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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권

때가 차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갈라디아서 4:4

박성목목사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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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차매 책 표지

책머리에

2천년이란 긴 세월의 분수령을 넘어 희망찬 21세기 새 역사의 아침이 밝았다. 현 시대는 최첨단 과학문명의 눈부신 발달로 인하여 인간이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시대가 되었고 현대 과학과 세상 물질의 우상 앞에 하나님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버렸다. 급변하는 사회생활 속에서 국가는 혼란에 빠져들고 인생은 향락과 방탕 속에서 삶의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성도들이 참신앙을 지켜 나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 같아 염려스럽기만 하다.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던 말씀대로 오늘날 성도들의 믿음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고, 신앙이 퇴색(退色)되어 가는 느낌을 받고 있다. 오늘 이 시대의 상황이 구약 말기 초림의 주님이 오실 때 나타났던 전환기의 모습과 형편이 흡사해지고 있다.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에 보면 분명히 은혜(恩惠)시대의 전파와 신원(伸寃)의 날, 즉 환난 날에 구원의 전파가 있다고 하였다. 오늘날 교회가 이 두 시대 역사를 알지 못해서 말씀의 혼선이 오고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므로 진리의 빛은 흐려져 가고 있다.
은혜시대가 끝나게 되면 신원의 날의 역사로 바뀌게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시대는 신원의 날을 전파할 전환점이 된 것 같다. 분명히 한 시대가 가고 또 다른 시대가 도래할 때는 말씀의 고갈이 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서 굶주리고 갈급한 자들에게 말씀의 만나와 진리의 생수로 영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주경학자도 아닌 목회자가 성경의 난해(難解)한 구절들을 가지고 강해(講解)를 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고 무척 두려운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려운 성경 구절들을 접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도 없는 일이다.
성경 해석은 성경 자체에서 해석할 때에 성령의 도움으로 말씀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나 부족한 자가 글을 쓴다는 것이 참으로 염려스러워 많이 망설였으나 여러 동역자들의 권유와 성도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지난번 담양과 전주에서 시작된 목회자 세미나 때의 강의 내용을 중심으로 졸문(拙文. Poor writng)이지만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동역자들과 성도들에게 신앙에 유익이 되고 험한 세상에서 큰 믿음의 힘과 용기가 되었으면 한다.
30년 간의 목회 생활을 돌아볼 때 특히 오늘과 같은 이 시대를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까지 잘못된 기독교 종말론(終末論)을 가진 자들이 신앙의 미혹(迷惑)과 생활의 탈선(脫線)을 많이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건전한 종말론은 성경의 핵심(核心)이 되는 것이다. 신앙의 길을 찾아 어두움을 헤쳐나가는 이 시대 성도들은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성경 말씀 안에서 삶의 좌표(座標)를 삼아야 한다.
이 시대는 교묘(巧妙)히 침투해 들어오는 거짓 선지자들과 이단들의 미혹으로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탈선과 믿음의 이탈(離脫)이 많아지고 있다. 저자는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거짓 선지자를 물리치며 넘어지는 양떼들을 바로 세우고 양떼를 지키려다 보니 성경을 더 깊이 상고(詳考)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양떼를 잃은 목자라면 동감이 갈 줄 믿는다.
혹시나 동역자들 가운데 신앙관이나 교리가 맞지 않는다고 오해가 되어 성급하게 질책(叱責)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자세히 다시 한 번 읽어보게 되면 이해와 많은 도움이 될 줄 믿는다. 저자 자신이 은혜 속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록한 글이지만 독자들의 좋은 권면이 있으면 감사할 뿐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눈물의 기도와 심혈(心血)을 기울여 교정과 편집에 수고해 주신 본 교회 남녀 종들과, 출판 헌금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d
끝으로 독자들에게 이 시대의 놀라우신 주님의 은총(恩寵)이 임하기를 기원(祈願)하는 바이다.

2008년 8월 1일
저자 박성목 목사

성경의 요지

성경의 요지 삽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1. 성경을 기록한 목적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거대한 우주를 창조하시고, 이 땅위에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건설하셨다. 그 중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形象)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3대(三大) 축복을 하셨다(창 1:28).

첫째, 번성(蕃盛)하여 땅에 충만하라 … 자녀
둘째, 땅을 정복(征服)하라 … 물질빛의 사자들
셋째,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 통치(統治, 지도자, 왕권)

하나님과 약속을 맺은 첫 사람 아담은 말씀에 불순종하여 범죄하므로 3대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상실(喪失)해 버렸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법을 어겼으므로 모든 만물까지도 저주(詛呪)를 받게 되어 사망이 왕노릇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생을 긍휼히 여기시어 다시 다른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여 잃어버린 3대 축복을 회복(回復)시켜 주실 것을 성경을 통하여 후세에 알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약속하신 나라가 회복될 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함으로 감사와 영광을 친히 받으시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을 기록한 것이다.
선악과 사건이 없었다면 성경을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 때문에 저주받은 이 땅에 마지막(둘째) 아담을 보내어 창조의 근본 목적(目的)을 회복하는 방법과 순서를 문자로 기록하여 훗날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신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회복하시는 과정은 이 땅에 육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 새로운 교회 확장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또 주의 재림의 징조를 말씀하실 때에 종교와 정치가 부패할 것과 무서운 환난이 일어난 후에 회복될 나라에 대한 것까지 자세히 기록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경은 한 사람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고 때를 따라 하나님께 의합된 여러 사람을 택하여 기록된 것이다. 이 일에는 농부, 노동자, 상인, 성직자, 귀족, 왕, 어부, 정치가, 공무원(세리), 교사, 의사, 시인, 음악가 등 여러 분야를 총망라한 인물들이 동원되었다.

2.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언약을 세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천하 모든 족속이 네 씨(예수 그리스도, 갈 3:16)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세우실 때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말씀하신 대로 당신이 책임을 지고 진행하겠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핵심(核心)이 된다(창 12:1-3, 13:14-16, 15:4-7, 18:17-18, 22:17-18).
이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실 때 연약한 사람에게만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도 친히 실행(實行)하시겠다는 말씀인 동시에 맹세인 것이다. 아브라함의 독자인 이삭을 3일 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물로 바치게 한 것은, 훗날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께서 제물이 될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첫째, 이삭 대신에 수양을 준비하심은 먼 훗날에 수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모형(模型)으로 나타낸 것이다.
둘째, 이삭이 제사 드릴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에 올라간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실 것을 모형으로 보여준 것이다.
셋째, 3일 길이 된 아브라함의 고통 기간은 유월절 3일 전에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겪게 될 고난의 예고가 된 것이다(마 26:1-2).
넷째, 육적 아브라함의 씨는 이삭이지만 영적 아브라함의 씨는 예수 그리스도이며(갈 3:14-16)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미리 보여준 것이다.
다섯째, 아브라함의 자손인 야곱의 12지파의 후손들이 출애굽하여 율법으로 광야 교회를 세워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12제자들이 성령의 법으로 피로 산 교회를 세워 본향(本鄕)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의 모형이 되었다.

구약 역사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르는 믿음의 영적 자손들이 애굽 같은 이 세상이 심판받을 때, 해방되어 천국에 들어갈 것을 출애굽 역사를 들어 거울로 보여주며 훗날 신약시대를 위한 실천적인 예언이 되게 하였다.

3. 시대에 따라 말씀을 주심

성경은 다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시대에 따라 역사하는 방법이나 양식(樣式)은 다르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 살면서 먼 훗날에 오실 메시야를 사모하였다. 그 때는 율법의 율례와 법도 아래서 하나님을 공경해야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다. 그러나 메시야가 말씀대로 도성인신(道成人身)하여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미 5:1-2),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사 53장),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부활하신 몸을 보이시고 승천하신 다음 약속대로 성령이 강림하셨는데도(욜 2:28, 행 2:1-4)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고 구약의 율법과 율례를 따라 행하면서 성령의 법을 무시하던 자들은 다 버림을 받았다.
구약 말기시대 사람들은 신약 은혜시대가 왔는데도 율법을 폐하지 않고 그대로 충성하다가 그 충성이 오히려 불법이 되었고 하나님 앞에는 악이 되었다. 은혜시대가 올 때에는 짐승의 피를 가졌던 이스라엘 사람이나 하나님을 몰랐던 이방이 하나같이 십자가 피 아래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다시 가입이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신약시대에는 십자가 피의 역사로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친자녀가 되었고 내세에 얻어질 기업의 소망을 바라보고 살아가면서 기다리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대적인 역사는 율법시대가 지나고 은혜시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약 마지막 때에 “신원(伸怨)의 날”이라고 하는 또 한 시대가 감추어져 있음을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은혜시대가 계속되기 때문에 십자가의 피로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나 신원의 날이 올 때에는 다시 말씀을 준비해야 되는 시대이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영생의 진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미혹하기 때문에 확실한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의 변질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순진한 성도들에게 접근할 때에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는 현상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은혜시대 말기 즉, 주님 재림 앞에 일어나는 징조 중 하나인 것을 알아야 한다.

4. 회복의 약속

구약시대에 일어난 모든 역사와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예언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회복(回復)될 나라를 염두에 두고 역사하였고 또 기록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먼저 택하여 언약을 맺으시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을 이방 땅으로 보내시고 때가 될 때까지 직접 간섭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을 400년 만에 그의 후손들에게 허락하실 때에 피의 언약을 맺게 하였고 출애굽 한 후에 율법을 주셨다.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양의 피를 가지고 광야 길을 통과하여 고향으로 갈 때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역사 속에서 하늘의 만나를 40년 동안 내려서 먹여 주셨다. 또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로 하여금 법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건너게 하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게 하였다. 이와 같은 출애굽의 역사는 신약시대에 예수의 피를 통해 구속받을 참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향 가는 과정을 미리 예행연습(豫行演習)을 시키면서 훗날에 되어질 과정을 모형으로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착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으며 그 곳도 역시 죄와 죽음이 있는 곳이요 눈물과 질병이 떠나지 않으며 분쟁과 싸움이 계속되는 곳이었다.
구약의 모든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 참이스라엘이 된 성도들이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이요 겪어야 할 생활 모습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고향을 찾는 성도들이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 말씀의 만나를 먹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법을 따라 약속된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축복을 가나안 행군을 실천적 교훈(實踐的敎訓)으로 본을 보여 주신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죽어 천당 가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만으로도 충분하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살다가 그 생명이 끝날 때에 내 영혼이 천사의 안내를 받아 하늘 나라에 들어가면 된다. 그러나 이 몸까지 구원을 얻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반드시 말씀으로 이긴 자들에게 허락되는 축복이기 때문에 구원의 영광도 다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싸울 때는 예리(銳利)한 검(劍)으로 나타나지만 광야 길을 갈 때에는 진리의 빛으로 인도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는 자들은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기 때문에 성경 말씀의 지도를 펴 놓고 방향과 위치를 정확히 살펴서 이정표(里程標)를 따라 지시대로 가야 정복자가 될 수 있다. 만약 우리에게 성경이라는 이정표가 없었다면 또 있어도 잘 모른다면 방향을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창조 이후 양심(良心)시대나 언약(言約)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없었지만 구원은 이루어졌다. 이제 이 몸까지 구속받아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는 성경 말씀의 법대로 준비하면서 성령의 도움을 반드시 받아야 어려운 난관을 통과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훗날에 나타날 일까지 미리 예정(豫定)하신 계획대로 이루시겠다는 단호한 의지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神)의 감동(感動)으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신의 도움을 입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다.
말씀의 약속대로 실천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말씀의 편지를 미리 보내주시고 준비시키시는 은혜를 생각할 때 크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피로 조건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광야같은 험한 세상을 지나서 죽음도 없고 슬픔이나 눈물도 없는 나라를 유업으로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의 만나요 진리의 보화인 것이다.
이 성경 말씀이 마지막 시대의 종들의 손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순교자의 피가 이 땅에 쏟아졌겠는가? 우리 역시 순교자의 신앙 사상을 따라 말씀의 전신갑주를 입고 그들의 원한(怨恨)을 갚겠다고 하는 순교의 각오를 가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 신원의 날의 역사가 끝날 때에는 6천 년 동안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이 회복되므로 약속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게 된다.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한 이후 황폐해진 이 땅이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될 때에는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고 하신 말씀과 네 자손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되리라고 하신 약속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고 하신 말씀까지 완전히 성취가 되므로 아름다운 나라가 천 년 동안 세워지게 된다(Α Ω 도표 참조).
하나님의 신(神)이 인간에게 뜻을 정하시고 성취될 때까지 조용히 숨어 계시는 것 같지만 정한 때가 되면 강한 용사(勇士)와 같이, 전사(戰士)와 같이 일어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역사를 위하여 말씀의 종들을 불러 역사하실 때 크게 쓰임받아 축복을 쟁취하는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각 시대의 전환기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 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4-17).

1. 전환기 때에 일어나는 현상들

언제나 한 시대의 전환기가 올 때에는 지도자들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하여 종교는 암흑시대(暗黑時代)가 되며 사회는 큰 혼란(混亂)에 빠지게 된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아도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제사를 통하여 물질의 이권(利權)에 마음을 두었을 때는 진리가 빛을 잃게 된다.
이와 같이 종교가 그 본질을 잃어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나무와 같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라도 이방 막대기를 들어 징계하셨다.
예레미야 7장 9절에서 14절에 보면 선지자와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을 때에 사회는 우상숭배 속에서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이 난무(亂舞)하였고 인심은 극도로 악해졌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부패한 백성들을 위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책망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 동안 종노릇을 하였다.
공관복음(共觀福音)을 살펴보면 구약 말기 율법시대에서 은혜시대로 바뀌는 전환기가 올 때에도 종교나 정치가 함께 부패하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지도자들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소경된 인도자로 전락(轉落)하였고 종교는 바른 진리를 나타내지 못하므로 혼란에 빠져들게 되어 사회 인심은 극도로 악해졌다.
성전의 외형은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이 부패하여 성전 제사는 상업화되어 버렸고 하나님께 향한 진정한 예배의 참뜻이 상실(喪失)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으나 신성한 교회의 참모습은 사라지고 성전이 매매하는 시장으로 바뀌므로 교회는 물질의 세력 앞에 점점 힘을 잃어가고 진리는 땅에 떨어졌다. 일반 제사에도 마찬가지지만 3대 절기(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때에는 2백만에서 3백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게 되는데 이들에게 제사 드릴 제물(소,양,비둘기)을 팔면서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제사장과 결탁하여 좋은 장소를 차지하는 댓가로 거금(巨金)을 제사장 손에 쥐어 주고 성전에서 제사 드릴 제물을 비싸게 파는 일들이 그 당시에는 통례(通例)처럼 되어 버렸다.
개인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오면 온갖 핑계나 조건을 붙여 불합격 판정을 내리고, 오히려 더 못한 동물인데도 성전 안에서 제사장에게 허락받아 검인(檢印)이 찍힌 동물만은 제사에 쓰도록 하였다. 성전 안에서 파는 짐승의 값은 일반 상품으로 나온 소나 양보다 열 배에서 열두 배 이상 비싸게 받고 세금도 없이 부당 이익을 거두어들이는 행동은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것도 모자라 타국에서 온 자들에게 돈을 바꾸어 줄 때도 비싼 환전료(換錢料)까지 받아 챙겼다.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 채찍을 들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을 다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상을 뒤집어 엎으셨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이사야서 56장 7절을 인용하면서 너희는 강도의 굴혈(掘穴)을 만드는도다(렘 7:11)라고 책망하셨다(마 21:12-13).
역사책에 기록된 사실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는 13개나 되는 연보함이 진열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의 화폐는 크게 나누어 금화(金貨), 은화(銀貨), 동화(銅貨)가 있었다. 부자가 내는 돈과 가난한 자가 내는 돈이 다르고 헌금을 넣을 때 위치나 소리도 다르게 들린다. 버스를 타면서 요금함에 돈을 넣을 때 500원짜리 동전과 100원과 10원짜리 동전 소리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같게 들리지만 버스 기사들은 각기 다른 소리를 민감(敏感)하게 듣고 안다고 한다. 성전 안에 나팔 같이 생긴 연보함에 금전(金錢)를 넣고 있는지 은전(銀錢) 또는 동전(銅錢)를 넣고 있는지 알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많은 연보함을 성전에 둔 것도 놀랄 일이지만 헌금을 연보함에 넣을 때 소리가 나도록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종교 부패가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가난한 과부의 엽전(葉錢) 두 푼은 제일 마지막 13번째에 놓여 있는 연보함에 넣었을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앞쪽에 금화나 은화를 넣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구약 교회가 변질되어 가난한 사람이나 불구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와 제사를 드리기가 힘들게 되었고 힘 없고 연약한 자들은 소외(疎外)되고 말았던 것이다.
미가서 3장 1절에서 3절에는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이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고 하나님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먹으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고기처럼 한다고 하였다. 지도자들이 얼마나 악랄하게 세속(世俗)화되었는지 성도들의 인권이나 재물을 유린(蹂躪)하기를 냄비에 담아 볶는 고기와 같이 한다고 하였다.
이같은 상황을 보신 주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탄식하였다(마 23:37). 내일의 멸망을 모르고 물질에만 혈안(血眼)이 된 자들과 무너질 도성을 향하여 주님이 우셨던 사건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구약 교회가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게 될 때에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집을 찾는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하므로 심적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물질에 눈이 어두어진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였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백성들은 도탄(塗炭)에 빠져 흑암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새벽을 알리는 세례 요한의 외침과 동시에 은혜시대의 먼동이 트고 있었던 것이다. 큰 빛으로 오신 주님은 예루살렘에 수많은 지도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을 부르지 않고, 북쪽 갈릴리 지방으로 가서 평생 바다밖에 모르던 비천한 어부들을 부르셨다.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한 시대의 막을 여는 일꾼이 되게 하실 줄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였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은혜시대가 새롭게 열릴 때에 구약의 거대한 율법교회와 정면으로 충돌이 생기게 되고 변론(辯論)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미(微微)한 어부 출신들을 통하여 부패하고 변질된 세력의 큰 산을 성령의 역사로 무너뜨리게 하였다.
복음의 위력(偉力)은 방해하면 할수록 불같이 퍼져 나가게 되었으나 사도들을 핍박하던 예루살렘 교회는 서기 70년경 로마 디도 장군이라는 몽둥이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왔으나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볼 수도 없었고 귀가 막혀진 자들이기 때문에 주의 음성을 듣지 못하다가 할례받지 못한 자들로부터 고통을 받아야 했다.
어느 시대든지 종교가 부패할 때는 국가도 타락하게 되고, 하나님의 막대기가 부패한 종교를 심판할 때에는 그 나라 백성까지 용서치 않게 된다. 지금까지는 이방이 구원받는 은혜시대의 문이 크게 열려 있었으나 이 문이 닫힐 때가 되고 새로운 전환기가 시작되면 초림 때와 같은 범죄가 되살아나게 된다.
오늘 이 시대를 돌아보면 이제 은혜시대가 끝나고 신원의 시대가 열리기 때문에 구약 말기 때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주님 오실 때가 되면 마귀가 발악을 하기 때문에 종교계뿐 아니라 정치계에서도 극심한 갈등이 생기게 되고 사회는 혼미한 상태에 빠지게 되어 투쟁과 시비는 그칠 날이 없게 된다. 조그마한 문제가 생겨도 분쟁이 생기고 싸움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타협점을 찾기 어렵게 되므로 피차 피곤을 느끼게 된다.
구약 말기에 구습(舊習)을 고수하는 종들과 한 시대를 내다보고 개혁(改革)을 요구하는 종들로 나누어지면서 신앙도 대립되고 종교분쟁으로 신앙의 갈등도 증폭되어졌다. 구약 율법시대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개혁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는데도 전혀 분별하지 못하다가 진리의 대적자가 된 것같이 지금 이 시대에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말씀을 정확히 아는 것이 비정상적(非正常的)이고 모르는 자가 오히려 정상적인 자가 되었기 때문에 말씀을 모르는 이들이 도리어 시대를 내다보는 자들을 핍박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택한 백성을 모으는 추수 때의 역사와 많은 순교자들의 피값을 갚는 신원의 역사가 우리 앞에 남아 있다. 이 때에 역사할 종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시기 때문에 말씀에 확신을 가진 자들은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사명을 위하여 생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어둡고 혼란한 때에는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 같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게 된다. 그러나 시대적인 말씀을 민감(敏感)하게 받아들이고 바로 깨달아졌을 때에 지혜로운 자는 스스로 준비를 하게 된다.
구약 말기에 새로운 은혜시대의 장(章)이 열리게 될 때에 택함을 입은 종들에게 이른 비 성령을 부어 역사한 것 같이 신약 말기에도 늦은 비 성령을 새로운 종들에게 부어주므로 택한 백성을 모두 찾는 역사가 있을 것이다(참고. 「두 시대의 성령」).
늦은 비 성령이 임하는 마지막 때에는 사회가 또다시 혼란스럽게 되고 경제가 어렵게 되며 인심이 악화되기 때문에 사명자의 길이 험하고 좁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길을 찾는 자가 지극히 적을 것이라고 하였다(마 7:13-14). 그러나 넓은 길을 따라가는 종들은 인본주의 사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에 모일지라도 참예배를 드릴 수가 없고 진리의 길을 따라가기가 어렵게 된다. 세상의 넓은 길을 가다 보면 물질이 중심이 되고 재물을 모으는 일에 관심을 두게 될 때 힘 없고 약한 자들은 소외되고 시험에 든 자들은 교회를 멀리하게 된다.
구약 때 가축의 왕인 소를 팔아 돈을 챙기는 것은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여 헌금하게 하는 것과 같고, 양을 팔아 돈벌이 하는 것은 어린양 예수를 빙자(憑藉)하여 물질을 강요하는 것과 같으며 또 비둘기를 파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라고 속여 부당하게 헌금을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종교를 빙자하여 물질을 착취하고 또 진리를 위장한 범죄들이 극성을 부리고 윤리와 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있으나 막을 길이 없다.
교회가 물질에 얽매이게 되고 세상과 타협할 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 되고 진리는 어두움에 가려지게 된다. 이런 현상들이 교회 안에서 나타나게 되면 성도들의 신앙 상태는 병이 들게 된다. 부패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성도들을 무속신앙으로 끌고가면서 자신은 사리사욕(私利私慾)만 취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일들이 종교계에 만연해질 때에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지탄(指彈)을 받게 되어 전도의 길이 막히는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주님이 보시고 또다시 채찍을 가지고 치면서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왜 장사하는 강도의 굴혈(掘穴)로 만드느냐 하시지 않겠는가?
교회는 연보를 해야 한다. 그러나 예배드리는 목적이 돈을 모으는 수단이 되면 안 된다. 돈 소리는 은행에서 나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하는 소리, 찬송하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나와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현재 교회 안에서는 돈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것은 전환기가 된 증거이다. 가을 나무에 찬 바람이 불면 하나같이 단풍이 들듯이 한 시대의 변천(變遷)기가 올 때에는 모든 종교가 물질에 눈이 가려지고 그 종교의 독특한 기본 색깔은 변질되어 알아볼 수가 없게 된다.
몇 년 전 필자가 광주 지역 집회 중에 모 기관장의 아들이 교회에 두 번 나갔는데 권력을 가진 아버지의 후광(後光)으로 집사로 임명받았으나 집사가 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교회의 출석도 잘하지 않고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가짜 집사라고 고백하면서 본인 자신이 엉터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소리들이 주위에서 심심찮게 들리게 될 때에 너무나 황당(荒唐)하고 부끄러워 목회자로서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날 교회도 신앙이 있건 없건 감사헌금을 매월 천만 원씩 1년만 내면 그 다음 해에 집사가 되고 곧바로 장로가 되는 시대가 왔다. 이것이 말세에 교회에서 나타나는 현대판 돈 바꾸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구약 말기에 초림의 주님이 오셨을 때나 신약 말기에 재림 주로 다시 오시는 이 시대의 상황이나 모습들이 거의 같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 앞에 나타나면 신원의 날이 밝아오고 있는 징조요 은혜시대가 끝나가는 증거가 된다.
많은 교회는 아닐지라도 몇몇 교회들 때문에 모든 교회가 비난을 받고 진리를 욕되게 하고 있다. 형편도 안 되는데 교인들이야 죽든지 살든지 예배당을 웅장하게 건축하면서 연보를 강요하고 또 많은 헌금을 못 내면 시험을 받아 교회마저 나가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때로는 교회를 무리하게 경쟁적으로 건축하다가 큰 문제가 생기므로 도중에 파탄되는 교회들도 종종 알려지고 있다.
그 중 일산의 모 교회와 인천의 모 교회는 온 교인들의 아파트를 담보하여 은행에서 대출받아 큰 맘모스 교회를 건축하는 도중에 부도가 나서 성도의 가정이 파괴되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데 이러한 일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절이 바뀌면 자연의 모습이나 형태도 변질되듯이 기독교의 전환기가 되면 순수한 믿음과 하나님께 향한 마음들이 식어져서 물질의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이 시대에 살아가는 나 자신도 부패한 지도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변질되어 가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백성들의 예배나 섬김을 싫어하신다.
말라기서 1장 7절에서 8절에 보면 더럽고 불결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눈먼 것, 병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제물은 세상 총독도 거절한다고 하였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제물이 형식화되어졌을 때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라고 하는 탄식은 한 시대의 말기적(末期的) 현상이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외치는 탄식의 소리인 것이다.
알파 때 역사와 같이 오메가 역사 때에도 마찬가지로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시대를 모르는 소경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된다. 신선한 교회가 물질 중심이 되고 각종 비리(非理)가 성행하게 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예물이 형식화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거절하시고 성전 문을 닫을 자를 찾을 것이다.
이 시대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충성되고 진실한 종이 되어야 하고 주께서 맡겨 주신 양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지혜로운 종이 되어야 한다.

때가 차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4-6).

“때”라는 헬라어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인데 이 단어의 뜻은 “어느 시점을 향해 흐르고 있는 시간”이란 뜻이다.
“찼다”라는 뜻의 플레로마(πλήρωμα)는 “충만, 가득 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 말은 프레로오(πληρόω 완수하다, 성취하다)라는 단어에서 온 말이다. 이 “때가 차매”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때가 꽉 찼기 때문에 계획하신 것을 나타내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예정하신 대로 정한 “때”가 되면 그 뜻을 기어코 이루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예비하시는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과 이루실 섭리를 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뜻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들을 기록하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했다(갈 4:4). 그 당시 율법 학자들은 “때가 찼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과 모든 공회원(公會員)들까지도 때를 알지 못하여 말씀대로 예수가 오신 것도 몰랐다. 이들은 오히려 예수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죽이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알았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선악과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원수가 되게 하였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따라 오랜 후에 말씀이 응(應)할 때가 되므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여자인 마리아에게서 나게 하셨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는 율법 아래에서 나셨고 한 시대의 전환점이요 분수령(分水嶺)이 되는 암흑기의 새로운 빛으로 임하셨다.
구약교회가 빛을 잃고 어두울 때에 참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자기 땅으로 오셨고 그는 또 높은 곳이나 환영받는 자리에 가지 않고 가장 낮고 죄 많은 곳을 찾으셨다.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친히 말씀하셨으나 그 빛을 보는 자가 없었고 그 뜻을 알아듣는 자도 없었다.
지금 이 시대 역시 종교계뿐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가 함께 부패하여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밤을 만났다. 정직한 사람을 만날 수가 없고 옳은 지도자를 찾을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면 또다시 한 시대의 전환점(轉換點)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말씀을 통하여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정확하게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 실족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구약 말기 어두울 때에 초림의 역사가 있었듯이 신약 말기에도 어둡고 혼란한 이 때에 재림의 역사가 있게 된다. 선구자들이 이 시대에 일어나는 징조(徵兆)를 살펴보면서 준비하지 못하면 구약 말기 때의 지도자들처럼 낭패를 당하게 된다.
구약 율법시대가 끝나는 시대의 전환기가 왔을 때에 주님은 바울을 찾아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맡겼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門下)에서 율법의 엄한 교육을 받은 자였으나 주님의 뜻을 알게 된 즉시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핍박받는 사도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는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고 율법만을 고집하였으나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았을 때는 과거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다 버렸다고 했다.
예수가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베풀어야 할 시기가 찼다는 것을 바울 자신이 깨닫게 될 때에 먼저 율법교회를 깨우치려고 하였다. 그는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며 다만 율법은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또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롬 3:20-24).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였으나 그 뜻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자가 없었다. 바울은 율법에 계속 얽매이지 않고 급선회(急旋回)하여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빛을 밝히며 은혜시대를 여는 선구자가 된 것이다.

1. 정치적으로 때가 찼다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실 정한 때가 되면 반드시 계획하신 대로 진행하시고 그 시대 백성이 환영을 하든지 배척을 하든지 예정하신 종을 세워 약속하신 뜻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때가 찬 경륜(經綸)을 따라 모든 면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가 되었다고 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고 몽학선생(蒙學先生)의 교훈을 따랐으나 믿음이 온 후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시기적으로 은혜시대가 올 때까지 세상 초등학문(初等學問) 아래에서 종노릇하였으나 율법시대를 마칠 때가 찼으므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고 하였다.
기원전 27세기경 로마가 초강대국으로 등장했을 때 황제 위주(皇帝爲主)로 국내외 수비(守備)를 강화하고 동방과 서방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장악하여 로마의 수중에 넣었다. 또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나라를 통치하게 하였으며 황제 숭배 사상과 문화, 교육, 종교생활의 풍습까지 로마의 통치권 안에서만 허용(許容)하였다. 이 때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노예가 되고 국가는 로마 정부의 하수인(下手人)이 되어 버렸다.
기원전 7세기경 가이사 황제가 통치 수단으로 로마에 속한 모든 식민지 국가에 인구 조사 명령을 내렸을 때에 유다 지역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요셉이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하러 가다가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탄생하게 된 것도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미가서 5장 2절을 응(應)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모략이 하나 하나 진행된 것이다.
오늘 이 시대 역시 나타나는 사건이나 여러 징조들을 말씀 안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주님 다시 오실 때가 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율법시대가 지나가고 십자가 피로 역사했던 은혜시대의 불길마저도 꺼져 가면서 또 한 시대의 막이 내려지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한 시대가 저물어지면 신원의 시대가 다시 또 열린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옛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부패한 사회와 혼란한 정치는 주님 오실 징조라고 하였으니 과연 이 때가 선지자들이 말씀하신 그 때로구나 하고 느껴야 한다.
신원의 날이 오게 되면 말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로 바뀌기 때문에 나타나는 징조들을 예리하게 주시하며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 시대를 먼저 내다보는 자는 때가 찬 경륜을 바로 알고 그 시대를 먼저 정복할 수 있는 개척자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1) 도로망 확충(擴充)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이 있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가 되니 로마 정부는 길을 닦는 일을 먼저 했다. 로마 정치 지도자들은 빠른 교통망을 통한 지배(支配) 수단으로 거대한 도로 공사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복음 전파에 큰 역활을 하였으며 사도들이 이 길을 따라 여러 지방으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 뒤에는 하나님의 깊은 모략(謀略)이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재림이 가까운 지금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볼 때 초림 때의 상황(狀況)과 모든 것이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계로 통하는 교통망을 봐도 미국이나 유럽까지는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초고속 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니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세계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구촌이란 말이 왜 나왔는가? 먼 나라들이 가까운 이웃 동네 같이 되어 있다. 이렇게 눈부신 교통의 발달은 우연(偶然)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21세기에는 세계의 교통망이 거의 일일 생활권 안에 있게 되었다. 이런 교통망을 통해 또다시 복음 역사가 새롭게 일어날 때라고 생각되어진다.
다니엘 12장 4절에 보면 마지막 때에는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한 말씀을 기원전 600년 전에 교통의 발달로 빠른 왕래가 있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그 때 예언한 시대가 지금 도래(到來)하였으니 하나님의 말씀은 한 치의 오차(誤差)도 없이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현재 유럽에서 중동 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오는 고속도로와 철도 공사가 시작되고 있다. 아메리카에서도 베링해를 건너 이 도로와 연결하는 획기적인 공사가 시작된 것을 보면 이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의 모략이 있음을 알 수 있고 대한민국 역시 땅이 좁은 나라에서 1년에 1억 인구가 떴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어마어마한 비행장이 영종도에 2001년 3월 29일에 1차 개항(開港)을 했다. 이같은 일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 시대를 열기 위해서 준비하시는 것이다.
앞으로 나타나게 되는 복음 전파는 인간들이 개발한 과학을 다 동원하게 되고 인공위성(人工衛星)뿐 아니라 모든 전자 장비도 크게 사용될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세계 곳곳 어디에서나 재림의 기쁜 소식은 동시에 전파될 수 있고 또 들을 수 있게 하므로 난시청이 없이 다같이 듣고 보면서 준비할 수 있게 된다.

2) 언어 통일

로마가 세계를 다스리기 위하여 언어를 통일할 즈음에, 초림의 주님이 오시게 되었다. 길을 닦고 언어를 통일한 것은 로마가 효율적인 정치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복음 역사에 있었다.
언어 장벽(言語障壁)이 무너지니 제자들은 여러 지방에 다녀도 의사소통에 막힘이 없이 복음 역사를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의 세계 역시 영어 생활권으로 통일되어 가고 있다. 21세기에는 세계의 공통어가 된 영어를 모르면 도태(淘汰)되고 만다. 미개한 나라이든 강대한 나라이든 영어를 모르는 나라는 살 수 없고 생존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
그러므로 원수의 나라라고 비난을 하는 공산국가에서도 영어만은 어릴 때부터 교육을 시키고 있다. 이제 지구라는 이 땅은 일일 생활권으로 좁아지고 언어가 통일되어 의사소통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보면 마지막 시대에 기독교의 사명은 막중함을 느껴야 한다.
이렇게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데 하루가 다르게 신앙은 퇴보(退步)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주의 종들은 복음 전파에 힘을 쏟아야 하고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도 소경이 되고 벙어리가 되어 이 시대를 진리로 깨우치지 못하고 있다.
다 꿈꾸는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며, 짖지 못하는 벙어리 개와 같다고 하였다(사 56:10).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잠들어 침체(沈滯)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은 몰락(沒落)하게 되고 신앙은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일반 신자들의 신앙 상태는 점점 진리를 사모하지도 않고 오실 주님을 갈급하게 찾는 자도 줄어들고 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주님 오실 때가 가까이 오고 있는데 신앙 상태는 오히려 나태해지고 있다. 이 시대는 주님 오실 징조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 원인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안일한 삶에 젖어 있는 자가 너무나 많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이나 돌아가는 정치나 종교계를 봐도 분명히 어떤 개혁이 일어나야 하고 돌파구를 찾아야 할 때가 왔다.
이 땅의 백성들은 신의 섭리를 무시하고 세상 지식과 화려한 과학 문명 앞에 종교인까지 잠식(蠶食)되고 말았다. 모든 인간의 행위가 신의 능력과 권한에 도전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기독교가 일어나야 할 때가 왔고 입을 열 시대가 왔다.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여러 정황(情況)을 살펴볼 때 말씀에 의한 신앙 개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인이 1천 명 이상 모이고 1만 명 모인다고 해도 교회가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주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30년 전, 50년 전의 신앙이나 지금의 신앙이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퇴보하는 느낌마저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지 진리 안에서 변혁이 일어나야 하고 미지근한 신앙 상태로는 이 세대를 이길 수가 없다. 자신이 먼저 말씀으로 살아날 때에 내 가족의 신앙을 바르게 정립(挺立)할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서 국가와 세계를 깨우치는 일을 하게 된다.
이 시대에 살아가는 종들도 늦은 비 성령을 받아 초림 때와 같이 복음의 빛을 밝히는 역사를 일으켜야 할 시점에 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받아 추수꾼의 사명자들은 이 때를 이용하여 오실 주님을 널리 알려야 하며 어두운 시대를 밝혀야 한다.
아모스 7장 10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시대에 종교가 어두워지고 나라의 부패가 극심했을 때 양을 치고 뽕나무를 재배하던 아모스를 불러 경고의 나팔을 불게 했다. 그러므로 시대를 볼 수 있는 종들은 선지자의 소리를 높이 외쳐서 성도들에게 때를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교통의 발달과 통일된 언어 전달 방법이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가 쉬워졌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을 우리 민족이 감당하여 제사장 나라를 만들어야 세계적인 역사를 수행할 수가 있다. 우리는 이 조그마한 대한민국 땅에서 살고 있지만 세계를 한 번 나가 보라.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침 저녁으로 부르짖는 민족,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나라가 있는가? 모이면 성경공부하고 전도하는 민족, 조그마한 문제가 있어도 금식하는 백성, 우리 민족처럼 특수한 민족은 없다. 이와 같은 민족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21세기에는 아무리 어려운 난제가 온다고 해도 기도하는 백성은 버리지 않고 지켜 주시기 때문에 알곡을 추수하는 역사가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2. 경제적으로 때가 찼다

초림 때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을 때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거대한 로마제국이 넓은 영토를 지배하고 있던 때에 여러 종류의 세금과 벌금 제도 때문에 국민은 도탄(塗炭)에 빠지게 되었으며 많은 백성이 경제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며 돈 많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을 탄압하였다. 로마 나라는 쾌락과 향락 속에 목욕 문화가 발달한 가운데 음란과 사치와 방탕이 극(極)에 달하였다.
서기 79년 8월 24일 정오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인구 2만이 넘는 대도시가 순식간에 묻혀 버렸다. 이렇게 환락(歡樂)과 쾌락으로 음탕한 폼페이 도시가 비참하게 멸망당한 최후의 날을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의 성적 타락이 극치(極侈)를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폼베이는 2만 명의 인구를 가진 지중해 해안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며 귀족들의 각광을 받는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문명이 발달하고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라 할지라도 퇴폐적인 문화 속에서 범죄가 하늘까지 쌓이게 되었을 때 순식간에 하나님은 그 땅을 엎어 버리신 것이다.
정치뿐 아니라 종교 사회 문화와 모든 면으로 때가 찼다고 했지만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악한 시대를 보고도 영적(靈的)인 눈이 감겨져서 보지 못했고, 귀가 둔해 듣지 못하였으며, 마음이 어두워져서 전혀 깨닫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뽑아내신 시대적인 선구자들만이 깨닫고 외쳤던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도 예외일 수는 없다. 이 땅의 죄악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될 때에 한 시대의 전환점(轉換點)을 예고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제나 새로 오는 시대의 비밀을 아는 선구자들은 핍박을 받게 되고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진리는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부패하면 사회는 급속도로 암흑시대로 발전되고 진리를 찾아보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하나님께서 한 시대를 여실 때, 유명한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는 감추시고 멸시받는 갈릴리 어부들을 일으켜 복음 역사를 하게 했던 것은 그 당시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장 약한 자들을 통하여 막강한 로마를 정복하게 하였고, 로마를 거점으로 삼아 세계를 태울 수 있는 복음의 불길이 일어날 줄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복음의 위력은 인간이 의지하는 총칼의 힘보다 더 강함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상황을 보면 금력(金力)이나 권력(權力)의 위력 앞에는 성실을 찾을 수 없다. 강자가 약자를 탄압하므로 가난한 자는 인권이 유린(蹂躪)당하게 되고, 그 억울함이 하늘에 사무치니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란 말이 유행하게 되고 부패된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의 신음 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다. 지금 이 시대의 상황을 보면 경제의 골이 너무 깊게 파여 힘없고 약한 자들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고 있다. 그러나 치부한 자의 사치는 극에 달하고 있다.
지난 번 어느 신문(2000년 6월 8일)에 보니 동부 이촌동에 95평 아파트가 24억 5천만 원이나 되는데도 24대 1이라는 경쟁률을 통과해야 구입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프리미엄이 8천만 원이나 된다는 소식에 놀랐는데, 2-3년이 지나서는(2003년 4월) 35억이나 껑충 뛰었는데도 50대 1, 또는 70대 1, 나중에는 180대 1로 발표가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최근의 삼성동 아이파크(I Park) 아파트는 프리미엄만 10억이 넘는다고 하니 천문학적인 금액인데 서민들뿐 아니라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에 와서는 재건축을 한다는 명목 아래 강남의 조그마한 13평 아파트가 4억에서 5억을 호가하니 열린 입이 닫혀 지지가 않는다.
또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가 금년(2004년 4월 16일) 쉐라톤 그랜드워커힐 호텔에서 세계 최고급 승용차인 마인바흐라고 하는 자동차를 선보였다. 이 자동차의 값은 7억 원 대의 초호화 세단인데 550마력의 12기통 터보엔진을 달았다고 선전을 하고 있다. 불경기 속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많은데도 벌써 몇 사람의 계약자가 나왔다고 한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의 자동차가 굴러다닌다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보통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가난한 서민층이나 소외계층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계시록 18장 3절에 주님 오실 때에는 극도로 사치하고 치부(致富)한다고 하였다. 백성들의 생활이 지금 이래서 되겠는가?
이사야 5장 8절에서 9절에 보면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田土)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부한 자의 사치와 빈핍한 자의 한숨이 극(極)에서 극으로 벌어졌을 때 하나님의 정한 때가 찼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때는 품군들의 마음에 근심이 쌓이게 되고 나라의 기둥들이 쓰러져 휘청거리며 경제가 쓰러지게 된다고 했다(사 19:10).
시대를 내다보는 종들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 시대가 오지 않았는지 살필 줄 알아야 되고 두려운 맘으로 주를 더욱 가까이 해야 한다. 옛날 선지자의 말씀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되면 세상이 악해지고 경제가 풀리지 않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물질 우상 앞에 엎드리게 된다고 하였다.
로마시대와 같이 지금 이 시대도 세금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더욱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가 다 하나같이 서민들만이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 사업이 힘들게 되면 직장생활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점점 생활고에 시달리는 자들이 많아지고 빈부(貧富)의 격차는 크게 벌어져 양극화(兩極化) 현상의 골은 더욱 깊게 된다. 백성들의 인심은 점점 살벌해지며 사람의 생명을 경시(輕視)하는 세상이 되므로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기피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탄압 정치 아래서 종교와 사회가 부패하게 되고 혼란한 경제 상황 아래서 백성들이 도저히 못살겠다고 몸부림 칠 때에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신 예수님은 어두워진 그 땅위에 빛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이 복음의 소식은 살 소망을 잃고 시달리는 백성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청량 음료와 같았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이 빛은 온 세계에 비취게 되었으며 택한 백성들은 기뻐하며 환영하게 된 것이다.
구약 말기 때에 바울이 때가 찼다고 말한 시대가 21세기에 또다시 오게 된 것이다.
종교계와 사회, 정치가 그 옛날 로마시대에 나타났던 현상과 똑같이 재연(再演)되고 있다. 이 상태로 계속 나간다면 앞으로 기독교인의 신앙이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스럽다. 서민들은 정치에 고통을 받고 세금에 시달리고, 종교에 실망하여 힘을 잃어 갈 곳이 없다. 국가의 법이 무시되니 사회 기반이 흔들리고 병든 가정은 위계 질서가 무너지므로 젊은 세대들의 이혼율은 위험 수위에 와 있으며 어린아이들의 양육이나 자녀의 교육을 지도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니 아무 힘이 없는 백성들은 삶의 방향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극도의 사치와 쾌락 문화 때문에 빚이 태산같이 쌓이고 신용불량자의 수가 늘어만 가고 없는 자는 있는 자를 증오하게 되는 사회가 되었다. 옛날에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카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니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유행처럼 성행하고 있다. 사회가 황폐하므로 피차 배신하고 불신하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을 열지 않고 스트레스 속에 피곤을 해소할 길이 없으므로 마약에 손을 대어 보기도 한다. 날마다 쌓이는 고통을 해소하려고 하지만 방법이 없고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고 해도 세상은 받아주지를 않으니 이것 저것 다 포기한 자는 죽음 싸이트를 통해 동반 자살을 하려는 자들이 점점 확산되어 가는 시대가 되었으니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3. 종교적으로 때가 찼다

로마 당시에 이방 신들이 득실거리고 가지각색의 신들이 일어나 피곤하고 지친 백성들을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로마제국은 황제를 숭배하는 사상을 일으켜 황제를 신으로 섬기게 하였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않을 때는 많은 희생이 따랐던 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니 소망이 없고 힘이 없는 자들은 빌 곳을 찾느라 산이나 물가에 가서 빌고 바위나 나무에 절하고 하늘의 일월성신(日月星辰)에 빌며 산당을 찾아 엎드려 복을 구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접(神接)한 자와 점쟁이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삭막(索漠)하고 암울한 시대를 헤쳐 나갈 길이 없었다. 이러한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메시야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이다.
언제든지 사회가 혼란하고 시대가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무당과 박수들이 판을 치고 신접한 자들이 엄청나게 성행하게 되며 기승을 부린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 사회는 로마 시대와 똑같은 형편이 된 것 같고 주님 오실 때가 임박한 것 같다. 이 시대 역시 신접한 자와 점쟁이들은 불경기가 없이 아주 호황을 누리고 있으며 이들이 부도(不渡)났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까지 이들의 문앞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고 서글픈 생각이 든다. 때로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우상 앞에 감사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직분자들 가운데서도 벌어지는 일이 있다고 하니 참종교가 무색하게 되고 말았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신접한 자를 찾아가지 아니하면 불안하여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항간의 일간신문에 1년에 신접한 자에게 들어가는 돈이 무려 5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혼란한 시대에 모든 백성들이 나갈 방향을 잃고 있을 때 점성가(占星家)들이나 복술자(卜術者)들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으며 사회는 망해도 이들은 배부른 시대가 되었다.
서울 강남 지역에만 무당학원이나 점술원(占術院)이 5-6곳이 성시(盛市)를 이루고 있으며, 5개월에서 1년 코스만 밟으면 자격증을 주고 개점을 하게 한다는 방송은 재난이 내릴 징조임에 틀림없다. 다른 신을 만들거나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축복이 떠나고 진노가 내리게 되므로 두려워진다. 이와 같이 사탄이 역사하는 시대가 계속될 때에는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위기가 오게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 국내뿐 아니라 세계 정치나 경제를 보면 위험 수위에 와 있다. 노사관계는 서로 양보 없이 팽팽히 맞서고 있으며 이 땅위에 좌경사상(左傾思想)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행동들은 하나님 앞에 피할 수 없는 진노를 쌓고 있는 짓이다. 이뿐 아니라 사상 이념 속에 지역 갈등과 세대 갈등, 빈부 격차 갈등이 서로 대립될 때에 나라는 병들게 되고 종교계는 어두운 수렁으로 함께 빠지게 된다.
이렇게 행동하는 마귀 사상은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국가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종교를 마비시키고 있으나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전쟁의 쓰라린 고통이나 삶의 고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세대들의 생각이나 행동들은 유물사상(唯物思想)으로 기울어지고 한탕주의와 요행만을 바라보고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앞에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을 보아도 선생의 존귀함이나 제자의 사랑스러움은 없어졌다. 그뿐 아니라 요즘 중고등학생들 중에도 마약으로 인한 범죄나 성범죄자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른다. 이런 현실을 선생님들이 알고 있어도 옛날같이 지도를 못하고 있다.
2001년 7월 31일(화)자 신문 보도를 보면 18초마다 범죄가 1건 꼴로 발생한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살인은 9시간 18분, 강도는 1시간 36분, 강간은 1시간 17분에 1건씩 발생하고 폭력은 1분 35초, 절도는 3분 간격으로 1건씩 발생했으니(경찰청발표)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 인구보다 3배나 많은 이웃 일본보다 3.7배나 높은 치수로 발표되었다. 교육계도 그렇고 생산기업도 10년, 20년 된 회사들이 많이 문을 닫아 버렸다. 1년에 수천 개의 기업체가 헤쳐 나갈 길이 없어서 쓰러지고 있으며 고난의 풀무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는 현실 앞에 누가 얽혀 있는 문제를 풀겠다고 하겠는가? 이제 기독교는 때를 따라 하늘의 만나와 진리의 생수를 가지고 새로운 활력소(活力素)가 되도록 다시 일어나서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
우리는 교회의 양적(量的) 향상도 중요하지만 질적(質的) 부흥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 새 교인이 와서 은혜를 받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감사해야겠지만 이미 먼저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신앙의 불이 붙어 깨어 있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한다. 주의 백성들에게 신령한 눈이 열려 내세를 보는 자가 되고 귀가 열려 말씀을 바로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자가 되도록 교회가 책임을 지고 힘껏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만 해도 5만여 개의 교회와 천만 명 이상의 교인이 있다고 하지만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부끄러운 일들이 나타나게 되므로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도 해결할 묘책(妙策)을 찾지 못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지만 세상은 더 악해져 가고 있으며 나라는 더욱 혼란스러워져서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확실한 믿음도 보장해 주지 못하므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가 영적인 무능에서 오는 현상이다. 지금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변혁이 와야 한다고 하면서 개혁을 부르짖으며 노력은 하지만 별로 소망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 시대를 보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할 것 없이 사업을 해도 재미가 없고 자식을 길러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모든 면에 낙()이 없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은 누구를 기다리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참성도의 마음 속에는 어지러운 세상이 속히 지나가고 평화로운 나라가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메시야를 간절히 사모하며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15세기 때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같은 종들이 지금 다시 나와야 한다. 그는 독일의 한 광부의 아들로서 세상 문학과 철학을 연구한 자였으나 여행 중에 큰 폭풍우를 만나 죽게 되었을 때 기도 중에 약속한 것이 있어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修士)가 되었다. 그 당시는 종교가 타락하여 면죄부 판매가 극성을 부리는 암흑시대였다. 교황청에 재정난이 극심하니 돈을 많이 내면 연옥(煉獄)에 있는 영혼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면죄부(免罪符)까지 생겼다.
이같이 종교계가 극도로 혼탁해질 때 95개 항목의 반박문(反駁文)을 성당벽에 붙이게 되었고 급기야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 때 그 날이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들은 참신앙의 길을 몰랐을 것이다. 루터를 통하여 희망의 서광(曙光)을 비추게 하였던 주님께서 이제 새 천년을 맞이한 이 시대에도 성경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아서 역사하도록 해 주셔야 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일으킴으로 멀지 않아 이 땅위에 소망의 기쁜 소식이 있게 될 것이다. 생활에 지쳐 있고 신앙에 갈급해 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말씀의 만나와 진리의 생수를 공급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만족케 될 것이다.
잠언 25장 13절에 보면 “충성된 사자(使者)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종들은 양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며 성경이 지시해 주는 그대로 바로 전해야 종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시원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가 찬 경륜을 깨닫는 지혜로운 자가 되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종이 되어 순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1) 세계적으로 말씀이 어두운 시대가 왔다

이사야 60장 1절에 보면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라고 했다.
어두움은 무엇이며 빛은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빛은 “오르(אור)”라는 창세기 1장의 그 “빛”과 똑같은 단어이다. 만들어진 빛이 아니라 원래 있는 그 빛, 곧 그리스도의 빛이다. 또 어둠이 땅을 덮는다고 했는데 이 어두움(חשך)도 해가 진 어둠이 아니라 죄악의 어둠이다.
“호세크”의 뜻은 “어두움, 두려움, 공포, 고민, 고통, 죄악” 등등 여러 뜻으로 나타난다. 정치나 경제를 봐도 어둡고, 종교를 봐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고, 사회를 봐도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져서 죄악의 어둠이 이 땅 어느 곳이나 다 덮고 있는 시대가 되어 두렵고 걱정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구약 말기에도 어두움이 온 땅을 덮었을 때 갈릴리에서부터 큰 빛이 나타났고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이 빛을 보았다고 했다(사 9:1-2). 그러나 그 빛을 모든 백성이 다 본 것은 아니다. 큰 빛이라고 했지만 선구자들에게나 큰 빛이었지 아무도 보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택한 백성에게 나타나서 예정된 자들만이 이 빛을 만나게 되었고, 사망의 길에 빠져 있던 백성들에게 큰 구원의 빛이 왔다고 했으나 모든 자의 빛이 아니었고 선택함을 입은 자들에게만 나타난 빛이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고 또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에도 제사장들과 예루살렘의 공회원들은 그 빛을 알지 못하므로 그 빛을 배척하였고 빛을 가진 자와 정면으로 충돌을 했다. 어두움에 속한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어두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큰 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환영을 하고 영접을 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진리를 대적할 때에는 어두움에 사로잡혀 악한 마귀의 도구가 되기 때문에 더욱 강퍅해진 것이다.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고 하였으나 스스로 빛 가운데 있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었으며, 요한복음 3장 19절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보면 종교계의 최고 지도자들이 세상과 타협하였기 때문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대적하게 된 것이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지도자들이 자기 현실에 안주(安住)하여 시대에 나타나는 말씀의 빛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 말씀이 귀한 줄을 깨닫지 못하므로 그 빛의 필요성이나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현 세상은 밝은 것 같으나 진리는 점점 어두워지고 목적지도 없고 방향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이 시대가 악하므로 백성들은 빛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려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계시록 8장 12절에 보면 “밤도 그러하고 낮도 그러하더라”고 했다. 낮은 빛이고 밤은 어둠이다. 그러니 빛 쪽에 서 있는 믿는 자들이나 어둠 쪽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주님 오실 때 진실한 신앙인이 점점 없어지고 바르게 믿는 자를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앞으로 빛은 멀리 사라져 버리고 어두움이 점점 깊어질 때 죄악의 밤은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 간에 홀연히 무너지는 것같이 된다고 하였다(사 30:13). 그러나 아무리 캄캄한 밤 같은 세상이라도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빛을 가진 종들을 강권적으로 일으켜 역사하실 때 택한 자는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일일이 다 모으리라고 하였다.
율법시대의 제사장들은 새로운 시대가 왔으나 알지 못했고 참빛이 왔으나 그 빛을 배척했으나 주님께서는 어부 출신들을 세워 그 시대의 선구자로 역사한 것 같이, 신약의 마지막 시대에도 새롭게 역사할 종들을 일으켜 21세기의 진리의 빛을 말씀으로 밝히게 하실 것이다. 그 당시 제사장들은 율법에 따라 습관대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며 절기를 따라 제물을 드리면서도 앞으로 다가올 신약시대의 예배 방법과 제사 목적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모르고 대적하였던 것이다.
시대의 전환기가 오므로 예수 자신이 어린양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이후부터 양잡는 제사는 폐하였으나 그 뜻을 모르고 계속 구약의 제사를 고집하다가 버림을 당하였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진 자만이 구원을 얻는 섭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복이 된 것이다. 참진리가 새롭게 나타나는 것을 이들은 깨닫지 못했고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오히려 모르는 그들이 정통이고 진리를 아는 자들을 이단시하여 정죄하였다.
지금은 모두가 예수님을 위대한 분으로 믿고 섬기고 있으며 또 세계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목수의 아들로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를 멸시하였고 초라한 이단 예수라고 냉대(冷待)했던 것이다. 그는 늘 배고픈 사람으로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비난하였고 세리와 창기의 친구요, 민족의 반역자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라고 하는 귀신들린 자로 평가하여 인간 이하로 취급하고 경멸(輕蔑)하여 죽여야 할 자로 매도했다.
우리도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주님에게 따뜻한 식사 한 끼를 대접했을 것 같은가? 역시 미친 사람이라고 그분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그 시대에 나타나는 역사를 모르면 외모와 나타나는 환경만 보기 때문에 인간들이 엄청난 실수를 범하게 된다. 시대 시대마다 응하는 말씀의 역사를 볼 줄 아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 모른다. 이러한 뜻을 알게 되는 것은 주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항상 겸손히 주께 엎드리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2) 지금도 오실 주님을 성경대로 기다리지 못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구세주(救世主)이시며 다시 오실 영원한 왕이시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이방 사람들은 세계 4대 성인 중 한 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같은 말은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는 무지(無知)에서 온 말이며 얼빠진 사탄의 소리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하는 율법시대 사람 역시 메시야가 이 땅에 왔으나 알지 못하였고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는 새로운 법이 있는 것과 은혜시대가 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이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면서도 성경대로 기다리지 못하였다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처럼 지금 은혜시대의 사람들도 앞으로 있을 신원의 날(사 61:1-2)과 역사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시대가 오는 것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있다.
은혜시대 말기가 될 때는 어떤 시대로 바뀌며 어떤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지 그리고 징조는 어떠하며 그 때의 준비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자들도 말씀에 무지한 상태에서 무속(巫俗)신앙에 젖어 환상이나 예언이나 방언에 취하여 막연히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많다. 또 기독교인들 중에 보수적인 성도들은 십자가 피의 은총으로 얻어지는 영혼 구원만 만족하고 마지막 남은 시대에 나타나는 징조와 몸이 변화되는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이러한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또 젊은 세대들의 신앙은 마음으로 뜨겁게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머리에 있는 지식으로만 오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좋고 안 오셔도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늦은 비 성령의 역사와 몸까지 구속받는 법이 있는 것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다. 지금까지는 십자가 피로 이루어지는 구원은 세계적으로 통일이 되었지만 영과 육까지 구원 얻는 말씀의 통일은 아직 하나가 되지 않고 있다.
어떤 목사는 이렇게 말하고 또 어떤 목사는 저렇게 말하여 재림에 대한 문제가 혼란에 빠져 있다. 성경 본문 안에서 확실하고 정확한 답을 찾고 말씀이 지시하시는 길을 따라 신원의 날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넓고 넓은 망망한 태평양을 항해하는 배도 가는 길이 있고, 하늘에 나는 비행기도 길이 있다. 이 땅위에도 차도와 인도가 분명히 있듯이 천국으로 가는 길도 즉 주님을 맞이하는 것도 또한 분명한 길과 정확한 방법이 성경 속에 있음을 알고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말씀의 길을 따라 어디든지 가야 하고 말씀이 멈추는 곳에 나도 멈춰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역사는 단축할 수도 늦어질 수도 없다.
이사야 60장 22절에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하면서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은혜시대가 끝날 때에 신원의 날로 바꾸시고 다시 한 시대의 전환기가 올 때에 하나님은 세상에서 강한 자와 권세 있는 자 몇 사람만 붙들고 일을 하시면 역사가 바로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아주 연약한 자들을 들어서 역사할 때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겠다고 하였다(고전 1:27).
하나님의 역사는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실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시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정하신 종을 세워 역사하시게 된다. 시대적으로 나타나는 징조와 일어나는 사건들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정한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아무리 약하고 힘이 없는 자라도 강하게 들어 쓰신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을 통해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겠다고 하신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려 때를 기다리며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 시대적으로 오는 모든 문제의 해답은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답을 얻을 수가 있고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이 시대의 흐름을 보면 작년보다 금년이 더욱 악해지고 해마다 범죄하는 수법과 강도(强度)의 치수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 세상은 점점 혼란해지고 있으며 하루가 다르게 어두움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구약 말기에 되어진 사건과 똑같이 신약 말기에도 그대로 되어지기 때문에 그 시대 상황을 바로 알면 신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창조의 역사를 보면 밤이 먼저 오는 것을 말하고 낮이 온다고 하였기 때문에 어두움이 되는 밤의 역사 속에서 인류는 시달리게 되었지만, 그 괴로움을 이긴 자들은 광명한 아침이 올 때에는 낮에 대한 축복과 영광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 날짜도 6일로 끝나고 7일째는 안식하시면서 엿새 동안에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 이레되는 날은 쉬셨기 때문에 이 법을 인간들도 지키라고 하였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고 이레째 되는 날은 여호와 하나님의 안식일이기 때문에 이 날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였다. 인생의 6일은 첫날부터 고난과 어려움이요 어두움과 괴로움의 날들인데 7일에는 안식일의 완전한 날이 되는 축복의 날이 되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6년은 노예 생활을 하다가 7년째는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거울이 되고 예언으로 본다면 괴로운 세상 역사는 6천 년으로 모두 끝나게 되면 1천 년의 안식의 축복이 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계시록 20장 4절에서 6절을 보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한다고 하였으니 어디에다 근거를 두고 1천 년 안식을 말했겠는가? 이제 이 세상은 6천 년이 끝나가는 시점에 와 있다(참고. 유월절 연대표). 이 시점에 온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제 세기 말도, 천 년 말도 지나고 새 천년이 도래(到來)한 연대를 보면 구약 4천 년과 신약 2천 년이 다 지났기 때문에 앞으로 이 세대(世代) 안에 일어나는 징조들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아모스 4장 6절에서 8절에 보면 어떤 지역은 비가 와서 풍년이 오는가 하면 어떤 지역은 가물어서 한발이 오고 민족들이 아우성을 치며 고통하는 때가 온다고 했다. 이 지구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이변(異變)과 징조들 속에 홍수와 가뭄이 극심한 가운데 유럽 지역에는 금년 여름의 기온이 40도 이상 올라가므로 1만여 명의 생명들이 더위에 죽었다는 사실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 땅에는 폭동과 테러의 공포 속에 날마다 위협을 느끼고 살아가고 있으며 여러 질병과 괴질의 두려움으로 출입마저 움추려 들게 되니 경제가 위축되어 생활의 고통을 받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이 땅에 청황색 말의 시대가 온 것 같고 순교자의 억울함을 탄원(歎願)하는 신원의 때가 바로 임박한 느낌이 든다고 경고해야 한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주의 종들은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왔다. 성도들에게 시대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올바른 말씀을 외치지 못하면 듣는 자들도 귀담아 듣지 않고 등한히 하다가 함께 멸망을 받게 된다. 성경을 윤리와 도덕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노아와 같이 환난을 준비하면서 시대의 소리를 외쳐야 하고 또 들어야 한다. 분명히 이 시대는 대단히 위험천만한 시대인데도 깨어 있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으나 소수의 무리들만이 영적으로 깨어나려고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다.
세계 전 지역을 살펴보면 말씀이 많이 응하는 지역이 있고 아주 응하지 않는 지역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말씀이 많이 응하는 사람이 있고 전혀 응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출발이 되며 하나님의 숨은 뜻을 나타내기 위한 신호탄이기도 하다. 때가 찬 하나님의 말씀의 경륜(經綸)이 우리나라와 이 민족 위에 많이 응하게 되고 우리에게 응하게 되어 우상은 이 땅에서 완전히 없어져야 하며 신정(神政)국가인 제사장 나라를 이루어 세계 복음화 역사의 중심 국가가 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신이 성경 말씀을 온전히 붙들지 않으면 힘을 얻을 수가 없고 사명을 따라 일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내가 살고 말씀을 위하여 몸을 바칠 때에 주님께서 의로 인정하실 것이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는 창조의 섭리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1-5).

1. 저녁과 아침의 감춰진 비밀

“태초(太初)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混沌)하고 공허(空虛)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水面)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稱)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1-5).
창세기 1장 5절에 “빛을 낮이라 칭(稱)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고 하면서 하루가 지나갔다. 창조를 시작한 첫날에는 지구도 생기지 않았고 태양이나 별들도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어떤 빛이 있어서 저녁이 오고 아침이 오게 되는가? 일반 상식으로는 지구와 태양 사이에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公轉)과 자전(自轉)을 하는 중에 낮과 밤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첫째 날은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날과 시간의 개념이 없는 상태이며 모든 시간이 멈추어진 상태인데 어떻게 저녁이 오며 아침이 오게 된다고 하였을까? 그리고 또 저녁부터 하루의 계산을 시작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
창세기 1장에 첫째 날(יום)부터 여섯째 날(יום)까지 저녁과 아침의 계산을 어떤 개념으로 계속 바뀌게 하였으며 지금처럼 24시간의 흐름과 날의 계산을 할 수가 있었을까? 우리가 계산하는 날의 시간은 아침이 먼저 시작되고 저녁이 오므로 한 날이 24시간으로 끝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날은 저녁이 먼저 시작되었고 그 다음에 아침이 오도록 하였고 인간의 시간과 관계없이 하루의 날 계산을 하였다. 그러므로 창조의 저녁과 아침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과는 아무 상관 없는 저녁이며 아침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 뜨는 아침과 해 지는 저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날들의 의미는 이 땅의 시간으로 지나가는 하루의 개념이라기보다 낮과 밤이 변화되는 시대를 염두에 두었다. 하루라는 날 속에서 어두운 시간과 밝은 시간이 나누어지듯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역사도 어두운 시대 이후에 밝은 시대로 바꾸어질 것을 설계하시고 저녁부터 출발한다고 하신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 창조의 6일은 6억만 년, 또는 60억만 년 그 이하나 그 이상이 될 수가 있다고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은 인간의 날과 시간 개념으로는 계산할 수 없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창조될 때에 밤에 속한 어두운 시대가 먼저 이 땅에서 출발되어 환난의 날들이 오게 하였다. 그 다음에는 낮에 속한 아침의 시대가 오도록 설계하시고 창조가 진행된 것이다.

1)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장에 첫째 날부터 시작되는 모든 창조(創造)의 날들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오게 된다고 하신 섭리를 따라 천지 창조가 진행되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을 일곱 번이나 하셨다. 특히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 만드신 마지막에는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면서 창조를 마치셨다.
그런데 맨 처음에 좋았더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어떤 피조물도 만들기 전에 이미 “좋았더라”는 말씀을 해 놓고 천지 만물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창 1:3-4).
“좋았더라”는 단어는 “토브(טוב)”인데 ‘선한, 아름다운, 좋은, 복’등 여러 뜻으로 쓰인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하나도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 때문에 좋았더라고 하셨을까? 맨 먼저 “빛(אור)이 있으라” 하시고 그 빛에 대해 참으로 좋아하셨다.
창세기 1장 3절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한 그 빛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시광선(可視光線)의 빛이 아니며 천지를 창조(創造)하실 때에 이 땅을 비추기 위하여 만든 빛도 아니다. 그렇다면 저녁이 되는 어두움 자체도 해가 지므로 나타나는 어두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3절에 “태초(太初)에 말씀(לוגוס 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또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다.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זוה הן טו פוס)이 되시는 분으로서 이 빛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도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한 것만 보아도 빛이 누구며 어두움이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또 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창세기 1장 3절의 빛을 짐작할 수 있다(요 3:19).
우주의 창조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그리스도 자신의 빛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빛을 통하여 이 땅에 생명이 탄생되는 것을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신 것이다.
삼위(三位)의 하나님께서 계획대로 첫째 날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어 놓고 둘째 날에 만물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서 생물이 살 수 있는 땅을 먼저 만들고 셋째 날에 열매 맺는 식물이 나도록 하였다(창 1:6-12). 넷째 날에 와서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시고 이 땅의 모든 생명체를 위하여 마오르(מאור)라는 가시광선의 빛을 만드셨다. 태양계에서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으로 나타나는 빛을 “마오르”라고 한다. 이 빛은 생물을 위하여 만들어진 빛이요, 밤과 낮의 시간을 나누는 빛이다. 그러나 첫째 날의 빛은 “오르(אור)”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이 빛은 만들어진 빛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창조의 빛으로 나타나셨고 이 빛이 훗날에 구원과 영생의 빛이 되기 때문이다. 첫째 날에 나타난 오르의 빛과 넷째 날에 만들어진 마오르의 빛은 단어 자체부터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 빛들을 잘 구별해 보면 각기 질적(質的)으로 다른 빛임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우주가 하나씩 순서대로 창조되었고 이 땅에는 아름다운 에덴동산과 모든 피조물들이 만들어지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形像)대로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갈비뼈 하나로 한 여성인 하와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친히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被造物)들이 제 위치에서 제 기능을 발휘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다.

2) 저녁이 먼저 오고 아침이 오는 비밀

성경을 읽으면서 저녁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아침이 밝아오는 과정을 생각 없이 무심코 지나쳐 버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창조 과정에서 저녁이 된다고 하니 밤이 왔구나, 아침이 된다고 하니 날이 밝았구나, 그저 우리의 생활방식대로 삶의 하루로 여겨 왔다. 그러나 밤과 낮이 바뀌는 시간 속에 시대의 흐름이 숨겨져 있는 깊은 뜻을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의 오묘(奧妙)하신 섭리에 또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설계대로 지구와 우주를 만들면서 도중에 수정하여 변경된 것도 없고, 시행 착오로 지연이 된 일도 없다. 그리고 또 진행 과정 역시 한 치의 오차(誤差)도 없이 움직이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뜻 속에서 저녁에 속한 첫 아담의 시대가 지나가면 낮에 속한 마지막 아담의 시대가 이 땅에 오는 것을 밤과 낮으로 구분하신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밤의 역사는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나타나면 어두움은 물러가고 낮의 시대가 올 것을 하나님은 미리 내다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모든 백성들이 아담의 범죄 이후부터 밤의 괴로움 속에서 슬픈 이별과 죽음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으나 이제 어두웠던 밤은 물러가고 광명한 아침이 오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의 신비(神秘)스러운 창조의 섭리 속에 깊은 비밀로 숨겨져 있었으나 이제는 다 밝혀질 때가 온 것이다.
저녁이 먼저 오는 창조의 원리(原理)와 하나님의 계획하신 섭리를 따라 밤에 속한 악의 씨들이 먼저 태어나서 낮에 속한 자녀들을 괴롭히지만 낮의 시대가 올 때는 어두움의 자녀들은 다 없어지고 찾아도 만날 수가 없다. 거기에는 낮에 속한 빛의 아들들만이 있기 때문에 어두운 밤이 없다는 표현을 하였고 영원히 낮만이 계속된다고 한 것이다.
창조의 질서대로 이 땅에서 만들어진 피조물들이 먼저는 육의 어두운 쪽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에 아담의 가정에서도 어두움에 속한 가인이 먼저 태어나서 빛의 아들을 대적하는 일을 하였다.
아브라함의 가정에도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났지만 저녁에 속한 밤의 사람이 되었고 나중 나온 이삭은 낮에 속한 빛의 자녀였다. 이삭의 자녀 중에도 장자인 에서는 어둠의 자녀로 먼저 출생이 되고 빛에 속한 야곱은 그 뒤에 태어났다. 야곱의 처인 레아와 라헬 사이를 보아도 라헬이 야곱의 총애(寵愛)를 받는 빛 쪽의 여인이 되었고 그의 아들 요셉이 장자가 되게 하였다(대상 5:1). 모압 땅에서 살던 나오미의 맏며느리 오르바는 어두움 쪽을 택하였고 작은 며느리 룻은 빛 쪽을 택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보아도 사울은 어둠이요 그 뒤를 이은 다윗은 빛에 속한 왕이었다. 하나님께서 먼저 택한 이스라엘도 표면적(表面的)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육적 이스라엘은 어둠에 속한 자가 되어 참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을 했고 나중에 나온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은 영적(靈的) 이스라엘이 되어 빛의 역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역사가 어두움에 속한 밤의 사람이 먼저 활동하게 되는 것은 창조 때에 저녁의 시대가 먼저 악을 행하고 그 뒤에 빛의 역사가 나와서 선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결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범죄는 어두움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어두움을 쫓아내는 데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이 해결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역사가 진행될 때에 인간의 생각으로는 수천 년의 세월이 길게 느껴지겠지만 천 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계산은 밤의 한 경점(更點)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부터 지금까지 6천 년의 긴 밤의 역사라고 하지만 하룻밤 정도의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성취의 시간은 인간이 생각할 때는 아주 먼 훗날 같지만 이루어지는 과정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순간적으로 나타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아직도 저녁의 시대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밤의 세력이 권세를 부리게 되고 빛의 자녀들은 아무 이유없이 고통을 받게 된다. 낮에 속한 자들이 어두움에 시달릴 때마다 빛의 시대가 오기를 소원하게 되고 괴로운 일이 많이 부닥칠 때마다 아침의 역사를 기다리게 된다. 밤의 생활이 끝없이 계속될 것 같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사로 밝은 낮의 시대가 시작될 때부터 모든 고통은 벗어버리고 어두움의 세상은 끝이 나게 된다.

2. 선악과 사건의 비밀

1)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드셨을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 원인과 결과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신(神)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결과까지도 모르시는 것이 없고 모든 일에 능(能)치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신데 왜 선악과를 만들고 그로 인해 죽음이 오게 했을까? 그리고 왜 에덴동산 중앙에 특수한 나무 열매가 매달리게 하셨을까?
인류의 조상 아담이 선악과로 인한 실수 때문에 죽음의 조상이 되어 어두움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모든 사람이 죄 아래서 그 뒤를 따라 죽음의 후손이 되었다. 이 선악과가 없었다면 죄도 없었을 것이고 이별의 괴로움이나 죽음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의 작품(作品) 중에 실패작은 없다. 다만 인간이 그 뜻을 모를 뿐이다.
그러면 과연 선악과를 만든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무소불능(無所不能),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기 때문에 귓속말로 하는 것까지 다 듣고 계시며 마음 속 깊은 생각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께서 왜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선악과 사건은 모르시는 것 같이 하고 계셨을까?
간교한 뱀과 하와의 대화 속에 미혹하는 말을 다 듣고 그 상황을 보고 계시지 않았단 말인가? 하와는 아담을 돕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였는데 돕기는커녕 남편인 아담도 망하게 하고 그녀 자신도 불행하게 될 것을 하나님은 전혀 모르셨단 말인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고 그 열매가 열리면 사고가 날 줄을 감지(感知)하지 못하셨을까? 또 하나님께서 만든 간교한 뱀이 혼자 있는 하와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기도록 미혹하는 것도 모르고 계시지는 않았을 텐데 왜 가만히 두고만 보고 계셨단 말인가? 선악과 나무가 없든지 그렇지 않으면 미혹하는 뱀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사고는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갖가지 의문을 가져 보았을 것이다.
인간은 뱀의 미혹을 몰랐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모르고 계셨던 것이 아니다. 엄청난 사건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뱀을 책망하여 쫓아 버리거나 말릴 시간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침묵만 하고 계셨다.
뱀의 미혹에 속은 하와는 금단(禁斷)의 열매를 따서 먹고, 또 남편 아담에게 가져갔고 아담은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음으로 평화로운 에덴동산은 돌이킬 수 없는 범죄의 산실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질 때까지 잠잠히 계셨으나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 아담을 찾아와서 범죄를 추궁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큰 사건을 미연(未然)에 방지하지 않고 이 지경이 되도록 버려두신 것을 원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선악과의 사건 속에 숨겨진 비밀이 무엇이며 나타나는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때에는 그 역사를 주관하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 선악과를 통한 하나님의 예정

왜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 중에 선악과만 특수한 질(質)이 들어 있게 하시고 미혹하는 원흉(元兇)인 뱀을 간교하게 창조하여 그 열매를 따먹도록 하는지에 대한 의심이 생길 수 있다.
또 왜 하필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에덴동산 중앙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심기워져 있었을까? 그렇게도 위험한 나무 열매라면 가까이 갈 수 없도록 하든지 손을 대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 나무 아래서 사탄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이미 사고가 예견된 일이 아니겠는가?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그 나무를 바라보는 순간에 마음이 끌릴 수 있도록 아름답게 보였으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 앞에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죽음의 독이 들어 있는 열매라면 외각지대에 있거나 손이 닿지 않은 곳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데 어렵지 않고 쉽게 딸 수 있을 정도의 높이에 실과가 매달려 있었고 뱀은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 열매를 먹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과정 하나 하나가 선악과를 따 먹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였고 자연스럽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주고 받은 몇 마디의 말이 역사를 바꾸어 놓고 말았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善惡果)의 법을 아담이 어기게 되는 순간부터 모든 축복은 빼앗겨 버리게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이 땅에는 사망이 왕노릇하게 되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인생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선악과는 한(恨)맺힌 나무 열매임에 틀림없다. 선악을 알게 되는 열매 하나 때문에 인생은 저주를 받아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그렇게도 좋아하신 에덴동산은 파괴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선악과 사건은 에덴에서 쫓겨나는 범죄의 시작이요, 어두움의 첫출발이 되어 이 땅은 밤같은 세상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밤길을 따라 빛이 오게 하셨고,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의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였다. 어두움이 있었기에 빛의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범죄와 타락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사죄의 은혜와 회복에 대한 감사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시고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통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실 때 감사할 수 있는 길이 된다.

3) 선악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길이 되었다

아름다운 에덴 동산에서 축복의 즐거움을 느껴보기도 전에 뱀의 미혹으로 하와는 선악과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신의 축복이 떠나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에, 아름답고 평화로운 동산이 뜻밖에 두려움과 어두운 공포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아담과 하와는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몸을 가리우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진풍경(珍風景)이 벌어지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실수한 말 한 마디로 이들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선악과 문제는 아담과 하와의 실수로 생각하고 간단히 넘겨 버려서는 안 된다. 뱀의 미혹을 받은 이들은 순간의 판단 잘못으로 실패한 것 같지만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하나님께서 훗날에 마지막 아담을 통하여 이 땅을 다시 회복하실 계획 속에서 모든 일이 진행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있기 전에,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모든 시간이 돌아가기 전에 성자 하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이 땅에 보내실 것을 먼저 예정하셨고, 또 범죄한 인생을 자신의 피로 구속하시고 많은 아들들을 탄생케 하며 그들을 통하여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목적이 선악과 사건 속에 숨어 있었다.
이와 같이 완벽하게 예정하신 설계 속에서 어두운 밤부터 출발하도록 허락하실 때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고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위치와 장소도 예정하셨고, 이 일을 위하여 말할 수 있는 지혜로운 뱀이 창조되어 하와 앞에 나타나도록 하였다. 선악과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어두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범죄와 죽음의 연속은 끝이 보이지 않고 심한 고통의 길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지만, 밝은 태양이 떠오르는 마지막 아담의 시대가 오므로 모든 것이 해결되도록 설계하신 뜻을 인간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는 어두움으로 출발했다 할지라도 그 어두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빛의 나라를 세우시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는 역사가 참으로 선(善)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처음 창조 때에 어두움은 죄가 아니었으나 죄가 발생한 그 후에 불순종의 결과로 어두움이 죄 쪽으로 옮기게 되었고 선이 되는 빛의 길과 어두움이 되는 악의 길로 갈라지게 되고 선과 악의 속성(屬性)이 후손들에게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논하게 되면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은 선하신 분만은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따먹게 하는 것 자체도 다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은 악을 조작(造作)하신 분이요 범죄를 유도(誘導)하시는 장본인이라고 판단할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악도 선이시다. 그분은 전 인류를 다 심판해도 선이 되고 악이라고 할 수가 없다(참고. 계 19:2=참되고 의로운 심판).
우리들로서는 하나님을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단할 수 없고 우리 머리로는 계산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을 몽땅 죽이는 심판을 하셨을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악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계시록 16장 7절에 보면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다 죽이는 심판을 하셔도 그 심판은 의로운 심판이요 참된 심판이라고 하였다. 만드신 분이 깨어 버릴 수도 있고 물건을 취하신 분이 내다 버릴 권한도 있는 것이다.
죄의 질(質)을 가진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참이 될 수 없어도 하나님이 참이라고 하면 그것이 참이 될 수 있고 그분이 죄가 없다고 하면 의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안에는 밤이 없듯이 그 분에게는 악이 없는 분이기 때문에 심판이 악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들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예정해 놓고 그 자녀들을 위하여 천지 만물을 순서와 절차를 따라 진행하시면서 아들을 보내도록 예정하신 것은 변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게 되므로 불행하게 되어도 그분의 피로 깨끗함을 입도록 작정(作定)이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범죄는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 역시 예견된 일이다.
첫 아담의 선악과 문제는 마지막 아담이 대신 죄과를 치르게 되므로 하나님과 끊어졌던 관계가 정상화되고 잃어버린 에덴 동산도 다시 회복되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한 것은 어두움의 고난과 밤의 환난을 통과하여 이긴 자들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낮에 대한 값진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방법을 하나님이 처음부터 선택하신 것은 오직 절대자이신 하나님 자신만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하신 것이다.
만약에 선악과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도 성립될 수 없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었다고 하는 약속도 거짓이 되고 만다.
죄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으로 죽을 자에게는 선악과는 철천지(徹天之) 원수가 되겠지만 예정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자에게는 선악과 사건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되게 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친자녀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이 뜻을 깨닫게 될 자들도 크게 즐거워하며 감사해야 할 것이다.
선악과 열매를 통한 뱀의 미혹은 예수가 이 땅에 오게 되는 길이 되었고 이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선악을 알게 되는 나무 아래서 뱀은 하와에게 접근하였으며, 하와는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금하신 나무 열매에 손이 가게 된 것이다. 에덴동산 중앙에 사망의 독이 있는 열매가 없었다면 영생의 열매가 귀한 줄도 모르고 주님에 대한 감사도 깨달을 수 없다. 에덴 동산에서 뱀의 미혹과 아담과 하와의 이러한 실족(失足)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신 일이요 처음부터 계획한 뜻을 이루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결과는 다 선한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와가 넘어진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약하여 미혹을 받아 범죄하게 되고, 아담은 또 사랑에 약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기게 되므로 넘어졌다. 언제나 마귀의 시험이나 미혹은 약한 쪽을 파고들기 때문에 말씀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이길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선악과 사건에 대해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든지 안 따먹든지 자유의지(自由意志) 속에 맡겨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자발적으로 순종을 통하여 보다 성숙(成熟)한 인격체로 승화(昇華)되도록 하기 위해 시험을 허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뱀의 미혹을 이기지 못하고 한 번의 실수로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범죄가 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멸망을 당하는 사건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서두에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 선악과 나무에 열매가 열린 것도, 동산 중앙에서 먹기 좋게, 보기 좋게, 쉽게 따먹을 수 있도록 하신 것도 하나님의 깊은 계획 속에 진행이 된 것이기 때문에 놀랄 일이나 원망할 이유는 없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고 했고(롬 5:12), 또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表象)이라고 했다(롬 5:14). 아담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인류가 같은 범죄자가 되어 사망이 왕노릇하게 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사망을 이기도록 하였는데 자유의지로만 넘겨서는 안 된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오른손으로 따먹든지 왼손으로 따먹든지 또는 양손으로 따먹게 되는 것 정도만을 의미한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그 열매를 따먹기로 예정되어 있는 가운데서 자유의지인 것이다.
이같이 원대(遠大)한 계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아담은 하와의 의사(語辭)를 조건없이 받아들였고, 남편을 돕고 살아야 할 하와는 뱀의 지시를 받아들이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이 땅은 밤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밤이 시작될 때부터 이 땅에는 선은 악과 싸우게 되고 질투와 분쟁이 생겼고, 엄청난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4) 구원과 영생은 거저 주신 선물이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선악과 사건 훨씬 이전부터 우주도 만들기 전에, 이 땅이 생기기도 전에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결정해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중심으로 이 넓은 우주를 창조하시기도 전에 이와 같은 설계가 이미 예정되어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미리 결정해 놓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신다는 말씀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우리가 어느 시대에 어디서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될 것과 어느 교회에 가서 말씀을 붙들고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된 프로그램을 바꿀 수가 없고 진행 과정도 벗어날 수 없다. 이 예정과 선택은 무조건 그분의 사랑 안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도 예정 안에서만이 얻을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범죄한 자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희생하므로 죄를 용서받게 하였다. 이러한 결정까지도 범죄하기 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러한 뜻을 막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게 되므로 하나님의 계획이 바뀐 것은 아니다. 또한 진행 과정에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기므로 예정이 취소되거나 어떤 변동(變動)이 온 것도 아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에는 아담과 하와가 연약하여 미혹을 받으므로 실패한 것 같지만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각본대로 뱀을 등장시켜 자기의 맡은 역(役)을 충실히 하도록 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진행 과정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자는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고 가문이 좋고 지식이 있어서도 아니다. 이 축복은 똑똑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 누가 부탁해서 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정과 선택 자체가 아무 조건이나 값도 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膳物)인 것이다.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택을 입은 자는 전혀 몰랐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 전에 예정해 놓았다가 때가 될 때에 불러주신 것이 오늘의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을 입은 자는 부족하다고 포기하거나 때가 왔는데도 연기하지도 않고, 반드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불러내어 예수를 믿게 하고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오(深奧)한 목적을 창세 전에 세워 놓으시고 그 각본(脚本)대로 모든 일이 질서 있게 이루어져 가는 과정 중의 하나가 선악과 사건이다. 미련한 인생은 선악과 사건과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깊이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받은 축복을 고마워할 줄도 모를 때가 많다.
첫 아담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음을 얻게 된 것 같이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의 선물을 얻게 해 주신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죽음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자는 영생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모른다. 귀한 것을 모르면 귀한 것을 주신 그분께 고마워할 줄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환난을 당했을 때 평안의 감사를, 질병의 고난에서 건강의 감사를, 멸망에 빠지는 것을 볼 때 구원의 감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어려움이 왔을 때 체험을 통하여 귀한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항상 축복만 있을 때에는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미련한 인생인 것이다.
창조 후 지금까지 인생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태양과 공기를 값없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한 번이라도 감사 예물을 드린 적이 있는가? 가장 귀한 것인데도 귀한 줄도 모르고 감사할 마음조차 없지 않았던가. 그 이유는 그것에 대한 고통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인생은 감사에 너무나 인색(吝嗇)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주의 백성들이 당하는 시련은 주의 나라에 가서 감사할 조건이 되는 것이며, 또 감사를 배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동기는 선악과 때문이다

하늘에 속한 신령(神靈)한 복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엡 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또 죄를 용서하시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엡 1:10).
아담으로부터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번도 부르지 못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동기는 선악과 때문이다. 선악과 때문에 죄가 들어왔고 그 범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창조주 하나님과 원죄의 담을 헐어 버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 오셔야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통일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선악과로 인해 죄가 이 땅에 들어왔고, 죄의 댓가는 두려움이요 그 결과는 사망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다 해결하게 되었고, 또한 현재부터 과거나 미래까지 어떠한 죄라도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게 되고 영원한 나라를 약속받은 것은 예수 자신의 십자가의 피가 없었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이 큰 역사를 하나님께서 이루었다는 것을 모세를 통해 기록해 놓았고 훗날 사도와 선지자들을 불러 이 사건을 다시 확인해 놓았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基業)으로 받을 자들에게 그 뜻을 변치 않으신다”는 약속까지 하셨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히 6:17-18).
이 약속은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자들에게 확신을 주는 말씀이요, 큰 용기와 위안이 되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실 때에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백성은 하늘 이 끝에서부터 땅 저 끝까지 다 찾아내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걸고 실천에 옮기시는 일이기 때문에 진행하실 때에 거짓말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첫 아담은 폐(廢)하시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질 나라를 위하여 기나긴 세월 동안 어두움도 이용하였고 빛도 나타내었고 자연 환경도 적절하게 사용하여 역사를 계속 진행하였다. 이러한 목적 속에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것들이 필요치 않은 부분이 없고 역사하시는 과정에서도 악한 자나 선한 자를 적절히 사용하시므로 섭리하신 뜻을 이루고 계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기 전에 아담을 먼저 세우셨으나 육의 사람을 통해서 나라를 이루실 목적은 아니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와 구속의 방법을 계획하실 때에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세워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으나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낮에 속한 나라를 회복하시겠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변할 수 없다.
에베소서 2장 4절을 보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범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아들을 예비하시고 죄로 죽었던 자를 살려주시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는 약속을 하였다.
요한일서 4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和睦祭)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다.
아무 조건 없이 아들을 보내시고 죄를 그에게 담당시켜서 화목제물로 삼으셨다고 하신 것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이익을 전제(前提)로 한 계산적인 사랑이다. 계산적인 사랑은 자신의 이익이 있을 때는 사랑하고 이익이 없을 때는 사랑을 버리게 된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무조건 희생하며 주는 사랑(ἀγάπη 아가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의 피를 통하여 흠이 없게 하셨고, 아들의 영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친아버지가 되었고 죄인 되었던 우리는 아들의 자격으로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아들의 자격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신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그러나 첫 아담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였고 그 유명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사무엘, 엘리야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하고 죽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혈통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예수가 이 땅에 올 때까지 수천 년 동안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였으나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총(恩寵)을 입었기에 예수께서 부르시는 아버지를 우리도 아버지라고 부끄러움 없이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범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였으나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새 생명안에서 다시 살려주셨으니 이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아들의 영을 또 주셔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ἀββᾶ ὁ πατήρ)라 부르게 하셨으니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혀 주신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갈( 4: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왔을 때에는 이미 부활하신 이후였다.
마리아는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을 바라보고 기뻐해야 되는데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다. 그 때 마리아는 동산 지기인 줄로 알고 우리 선생님의 시신을 어디다 두었는지를 물었으니 사랑했던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랍오니여(선생님이여)”라고 하며 잡으려고 하였다(요 20:15-16).
예수께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하시면서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라고 부활하신 날 아침에 비로소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이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라고 소개했다(요 20:17).
이와 같이 선악과 사건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는 선악과가 우리에게 미치는 축복이 얼마나 크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만 입이 내게 있어도 그 입을 가지고 나를 구원해 주신 축복의 은혜를 늘 찬양해도 부족할 것이다.
이렇게 다정다감(多情多感)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대언기도를 쉬지 않고 계신다(롬 8:33-34). 그러나 이제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할 때가 왔다.
주께서 가실 때에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였고(행 1:11), 구름 타고 강림하실 때에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보게 된다고 하였다(계 1:7).
또 가실 때 처소를 예비하고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시겠다고 하였으니(요 14:1-3), 그 말씀을 붙들고 성도들은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종말에 전 인류(人類)의 심판이 오는 것을 무척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한 번은 통과해야 새로운 날이 오게 되고, 어두움의 분수령(分水嶺)을 넘어야 찬란한 새 아침이 밝아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자녀들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독수리의 날개로 특별히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에 크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은 어두운 밤 시대의 마침이요 빛의 역사가 시작되는 낮의 시대로 바뀌게 된다.
재림의 아침은 추수 때에 택한 백성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일이기 때문에 즐거운 소망 속에 오히려 그 날을 두려움 없이 감사하므로 기다려야 한다. 찬송가 중에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나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를 찬양하는데 이것은 마지막 아담을 통해 회복(回復)하는 아침의 역사를 찬양하는 기쁨의 표현인 것이다.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은 다 이루어질 것이다. 빛의 아들들은 아침의 역사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찬송가 259장이 내 마음을 흔드는 것 같아 가사를 적어 보기로 하겠다. 우리 다 함께 힘차게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불렀으면 좋겠다.



빛의 사자들이여(259장)
1절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후렴: 빛의 사자들이여 복음의 빛 비춰라 죄로 어둔밤 밝게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2절 선한 역사 위하여 힘을 내라 주 함께 하시겠네 주의 넓은 사랑을 전파하며 복음의 빛 비춰라
3절 주님 부탁하신 말 순종하여 이 진리 전파하라 산과 바다 건너가 힘을 다해 복음의 빛 비춰라
4절 동서남북 어디나 땅끝까지 주님만 의지하고 어두워서 못 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먼동이 트는 새 아침의 날이 밝아 오기를 우리 빛의 아들들은 하루를 천 년같이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망했던 빛난 아침의 나라를 사모하며 어둠의 옷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 시온의 영광이 임하는 아침이 올 때에는 죽음이나 눈물, 고통이나 이별이 없는 나라라고 하였다.
이같이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을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입을 통하여 알려 주셨으나 그들은 그 나라를 멀리서 바라보고 사모(思慕)하였고 환영하면서도 살아서 얻지 못하고 죽었다. 이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나라의 약속을 받았기에, 날마다 사모하면서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힘들고 괴롭고 지루한 날들이 나를 괴롭히더라도 약속의 말씀이 있기에 참고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므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자신의 십자가를 벗지 않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멀지 않아 좋은 일이 있게 될 것이다.

3. 아담의 결혼 비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取)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稱)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聯合)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찌로다”(창 2:21-24).

1) 아담의 갈빗대로 만든 하와

창세기 2장 21절에서 24절에 보면 이 땅에서 최초(最初)의 결혼제도가 나온다.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죄와 죽음을 모르는 부부로서 첫 가정을 이루었다.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이 지었으나 그 아내의 이름은 아담이 짓도록 했을 때 여자라고 이름을 불렀으며 아담이라는 이름은 사람이라는 뜻이므로 “사람아, 사람아”라고 하나님은 찾으셨고 그 아내의 이름을 “여자야, 여자야”라고 아담이 불렀다. 하와라는 이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지은 이름이다(창 3:20).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아주 부드럽고 고운 흙(עָפָר 아파르)으로 만들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어 첫 사람이 탄생된 것이다(창 2:7).
생기(נְשָׁמָה 뇌솨마 : 콧김, 호흡)를 코에 불어넣어 숨 쉬는 생령의 사람(לְנֶפֶשׁ חַיָּה 레네페쉬), 즉 살아 있는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창 2:7). 그 다음에 아담의 아내를 만드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흙으로 새롭게 여자를 만들지 않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살 찢고 피 흘려 갈빗대 하나를 뽑아 한 여인을 탄생(誕生)케 하신 것이다.
아담이 얼마나 깊은 잠이 들었기에 갈빗대 하나를 뽑는데도 몰랐을까? 그렇다면 그 잠은 어떤 잠이었을까? 하나님은 어떻게 마취를 하셨기에 갈빗대를 뽑아 하와를 다 만들 때까지 아담은 모르고 잠들어 있었을까? 자신의 몸을 찢어가며 큰 희생(犧牲)을 치뤄야만이 아내를 얻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동물의 짝을 만들 때와는 전혀 다른 방법이다.
어쨌든 이색(異色)적인 공법을 사용하여 하와를 만들고 아담에게로 이끌어오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아담 자신의 몸에서 찢어져 나간 일부의 분신(分身)이라는 뜻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聯合)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했다(창 2:24). 남자는 아담밖에 없는데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고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흙을 빚어 처음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아담의 부모는 있을 수가 없으며 또 만들었다고 부모가 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부모가 없는 남자에게 하나님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몸이 된다고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직접 흙으로 아담을 만드셨고 만드실 때의 과정도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로 간다는 말씀을 하신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실 우리나라 결혼 제도에도 그렇고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지금까지의 결혼을 보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지 않고 여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이 결혼의 통례(通例)인데 본문에는 반대로 설명하고 있다. 아담의 부모는 누구인가? 부모가 없는 남자가 왜 부모를 떠나서 여자와 연합한다고 했을까? 그리고 왜 남자의 몸을 찢어가면서 여자를 만드셨을까?
첫째, 첫 사람 아담은 흙에서 나왔는데 부모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땅위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혈통(血統)에 관계되지 않고는 부모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을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른 적도 없거니와 부를 수도 없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아들은 독생자 예수 한 분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둘째,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어느 지역에 살고 있든지 한 여자는 남편을 만나게 되면 자기 부모를 떠나 남자에게로 와서 두 독립체(獨立体)가 연합(聯合, 결합)이 됨으로써 한몸을 이루어 부부가 되는 것인데 이와 정반대로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그리고 아담은 부부가 되는 과정에 대단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창세기 2장 23절과 24절에 남자인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서(취하여) 그의 아내를 만들고 이름을 여자라 했다. 이 사건을 살펴보면 아담이 부모를 떠나 아내에게로 오는 일도 없고 아담이 부인에게로 가서 연합(聯合)하는 것도 아니다.
셋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고 했다.
연합 또는 결합(結合)이라는 것은 다른 두 독립체가 서로 만나서 하나로 묶어질 때에 쓰는 말인데 사실 아담과 하와 사이에는 “결합, 연합, 둘이 붙이다”라는 단어를 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와는 아담의 몸에서 찢겨져 나간 부분(部分)이요 자신의 갈빗대이므로 연합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이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몸이 결합되어 한몸이 된 부부(夫婦)가 아니다. 그 이유는 이미 아담의 뼈 중 한 부분의 뼈이며, 그의 살 중 한 부분의 살이 찢겨져 나갔기 때문에 아담 자신의 지체요, 한 분신(分身)일 뿐이다.
아담과 하와 두 사람에게 연합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데 하나님은 왜 연합해서 한몸을 이루라고 한 것일까?
아내와 연합하여 한몸이 된다는 내용은 이 두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보다 또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죄 없는 아담을 잠들게 하고 살 찢고 피 흘려 갈빗대 하나를 뽑아내는 희생으로 그 아내가 탄생되는 과정은 먼 훗날에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창조 때 아담과 하와의 결혼의 비밀 속에 둘째 아담이 이루실 섭리를 담아서 때가 올 때까지 깊숙이 감추어 놓은 것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다.

2) 이 비밀(秘密)이 크도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秘密)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에덴동산에서 결혼의 역사가 출발했기 때문에 주례자가 남녀의 결혼을 언급할 때에는 창세기 2장 24절을 인용하고 있다.
본문에 기록된 말씀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는 것이 무슨 비밀인가? 이것도 보통 비밀이 아닌 큰 비밀이라 했다. 내가 한 여자와 결혼하여 사는 것이 무슨 비밀이 된다는 말인가? 남녀의 결혼제도를 큰 비밀이라고 한다면 하루에도 수천 수만 쌍의 큰 비밀이 이 땅위에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비밀은 남녀가 만나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그 숨겨져 있는 큰 비밀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남녀 결혼은 그리스도와 성도가 연합하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줬기 때문에 인간의 결혼은 주님을 만나는 예행 연습을 하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 아무 죄도 없는 상태에서 깊이 잠들게 하고 자신의 몸을 찢고 갈비뼈를 뽑아 아내인 하와를 얻은 것은 먼 훗날 신약시대에 오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이다.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하늘 보좌 아버지 곁을 떠나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살 찢고 피 쏟아 3일 동안 깊이 잠드신 다음 성도인 우리를 자신의 신부(新婦)로 얻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창세기에서 실천적(實踐的)인 예언으로 보여주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모형과 예표(豫表)로 나타내신 것이다.
예표적인 아담을 흙으로 만드셨고 에덴동산을 맡기셨으나 뱀의 미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 때문에 실패한 과정은 하나님이 둘째 아담을 통하여 나타날 역사를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누구의 잘못이나 실수(失手)로 돌릴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과정이 없었다면 성자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고 죄의 문제로 고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이 성취되도록 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반드시 범죄한 땅으로 와야 하고, 또 그렇게 오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먹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큰 사건의 주역을 뱀에게 맡겨 놓았기 때문에 자기 사명을 위하여 하와를 찾아가서 미혹을 하게 된 것이다.
첫 아담의 결혼 방법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성도를 얻게 될 것을 거울로 보여 주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表象)이요 모형(模型)이라고 하였다(롬 5:14). 표상이라는 단어는 “튀포스(τύπος)”인데 ‘형상, 흔적, 거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에덴에서 첫 아담이 살 찢고 피 쏟아 희생한 대가로 그의 아내를 얻은 것 같이 마지막 아담도 그와 같은 과정으로 살 찢고 피 쏟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였다. 한 남자의 희생의 대가로 신부가 탄생하는 모습을 에덴동산에서 보여주면서 선악과의 큰 비밀 속에 묻어둔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는 신약시대에 성도와 그리스도가 연합하는 표상(거울)이 되며, 그런 연합이 성취될 때까지 비밀 중에 큰 비밀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는 창세 전에 이미 창조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신부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엡 1:4).
마태복음 19장 6절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는데 지금까지는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세상에서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헤어져서는 안된다는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만 권면해 왔다.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의 참 의미는, 하나님께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는 그의 신부로 짝을 정해 놓았는데 인간이 신랑이신 주님을 싫다고 해서 마음대로 헤어지거나 나누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주를 만들기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죄악에 묶여 있는 자를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서 그를 자신의 신부로 삼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자로 예정해 놓은 것을 사람으로서는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상 결혼은 살다가도 나눠지고 결혼 당일에도 헤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현 세상에서 결혼한 남녀 부부의 만남은 참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 연습하는 과정이요 실습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들은 암컷과 수컷은 서로 싸우거나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들은 남녀가 짝을 지을 때에 하나님 앞과 대중 앞에서 서약까지 하고도 싸우고 헤어지며 원수가 되고 죽이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만난 남녀의 짝은 참짝이 아니기 때문에 불평(不平)과 시비(是非)가 생기고 싸우게 된다.
신부가 되는 성도의 참된 짝과 확실한 배필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짝이 되고 영원한 배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자신의 짝된 신랑인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게 된다. 이 세상에서 남녀가 자기의 배필을 찾고 서로 만나는 것은 참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지루하지 않게 기다릴 수 있도록 길동무로 주신 것이다. 길동무를 잘 만나면 하루 해가 질 때까지 심심하지 않고 즐겁게 지내며 대접과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형이요 연습일 뿐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모든 사람들이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가 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참남편인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세상 쾌락이나 향락을 위해 남편을 얻은 자들은 신앙의 지조를 버린 자이기 때문에 남편 앞에 설 수가 없다. 세상과 짝하는 성도를 간음하는 여인이라고 하였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하였다(약 4:4).
성도가 세상과 타협하면서 간음을 한다면 남편 되신 주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성도가 사탄의 손에서 죽게 되었을 때에 참남편 되신 주님께서 구출하시고 더러운 죄와 허물을 자신의 피로 씻어서 신부로 만들어 주셨는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죄인을 위하여 생명까지 버리고 살려주신 주님을 멀리하고 고멜같이 음녀가 되어 세상에서 놀아난다면 생명의 은인(恩人)이시요, 영생의 주님께 배신자(背信者)가 되는 것이다. 신부 될 자는 끝까지 기다리며 신앙의 지조를 버리지 말고 한 남편인 그리스도를 영원히 사랑해야지 배신자가 되면 안 된다.
성도의 참된 남편인 주님께서는 이 세상 끝날에 영원한 나라를 세우고 우리를 다시 찾아오신다고 하였다. 이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어두움의 역사는 계속되지만 정한 때가 오면 반드시 주님께서 예비하신 나라에 들어가서 길이 길이 영광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러한 목적을 계획하시고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에 갈비뼈를 뽑아 여자를 만들어 그의 아내로 주시면서 훗날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거울이 되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어 성도와 연합될 것을 결혼의 큰 비밀로 숨겨 놓고 정한 때까지 기다리게 하였다. 이제 주님과 연합되는 뜻을 깨달은 자는 다시 오실 신랑에게 더욱 열심히 충성하며 그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엡 5:31).

3) 잉태의 고통과 남편을 사모하는 것도 훗날의 모형이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苦痛)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 3:16).
① 잉태의 고통이란 무엇인가
하와에게는 잉태의 고통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을 세밀히 관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준다고 말해 왔다.
많은 사람들이 선악과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해산(解産)의 고통을 주었다는 것으로 알고 여인들이 출산을 할 때에 산고의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분명히 잉태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여자에게 잉태의 고통이 있는가는 본인 자신이 잘 알 것이다. 잉태될 때에는 여자가 고통을 느낄 수가 없고 잉태된 후 2개월에서 3개월이 지나야 잉태된 흔적(痕迹)으로 입덧을 할 때에 비로소 본인이 잉태한 것을 알게 된다. 여인에게 잉태의 고통이 있게 된다는 성경 구절도 훗날 이루어질 예언으로 보아야 한다.
하와에게 잉태의 고통이 있게 된다는 뜻은 주님의 신부 되는 성도들이 말씀의 씨, 즉 진리가 그 속에 들어갈 때부터 신앙의 진통(陣痛)이 따르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 피의 은총을 입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진리의 말씀의 씨가 내 속에 들어와 새 생명이 잉태될 때 따르는 고통은 견디기가 어렵다. 심지어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는 괴로움이 온다는 것이다. 주님을 믿고 참 좋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는 시험이 오고 어려운 핍박과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서 역사할 때 자신은 물론 가족 간에도 시련(試鍊)과 환난이 따르게 된다.
주의 신부 될 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잉태의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한 그대로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진리 때문에 여러 가지 시련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주님이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기게 되어 주의 신부의 반열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② 하와가 남편을 사모하게 되는 뜻은 무엇인가
“너는 네 남편을 사모(思慕)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너는 네 남편을 사모하고”라고 했는데 그 당시에 아담과 하와는 헤어지지 않았고 밤이나 낮이나 같이 있었으므로 사모한다거나 갈망(渴望)한다는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이 말씀 역시 예언이 되어 신부 된 성도들에게 응하고 있다. 오늘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성도들을 구속하시고 그들을 예수 자신의 신부로 삼으신 후에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이 땅에 성도들을 남겨 놓고 하늘 보좌 우편으로 가셨다. 그 후 지금까지 신부 된 성도들은 다시 오실 그 남편을 사모하며 항상 기다리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은 하와에게 항상 남편을 사모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훗날 예언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참남편인 그리스도를 떠나보내 놓고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하늘에 조그마한 구름 조각만 떠올라도 주님이 오시려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하면서 애절한 심정으로 사모하는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첫 아담이 훗날에 마지막 아담의 모형이라면 그 아내인 하와도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형인 것이다. 신부 된 성도들이 2천 년 동안 오실 주님을 그리워하면서 신랑으로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했던 것이다. 신랑이신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첫 아담의 어두웠던 시대는 청산이 되고 찬란한 새 아침의 시대가 열리게 될 때에 이 땅에 괴로웠던 모든 것이 꿈결같이 사라질 것이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눌려 있던 성도들이 완전히 해방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게 되는 나라가 이루어질 때에 사망이 없고 아픈 것이나 괴로운 이별과 슬픈 눈물이 없다고 했다.
창세기 1장에서 어두움이 먼저 일어나게 되는 비밀과, 아담과 하와의 결혼의 비밀과 사탄을 통한 선악과의 사건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며, 이 역사를 때가 될 때까지 큰 비밀 속에 담아 놓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다.
이 모든 계획과 뜻하신 바를 하나 하나 진행하시며 이루실 때에 기뻐하였고 그 결과를 내다보시고 참으로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은 오늘에 와서 벌레같은 인생이 깨닫고 이해할 때에 얼마나 감개무량한 일인가?
창조의 섭리와 거대하고 방대(尨大)한 하나님의 계획들 속에서 어둡고 긴 밤이 지나가고 영원히 즐거운 아침의 나라에서 누릴 영광까지 세심하게 준비하셨으니 창조의 신비(神秘)가 얼마나 오묘(奧妙)한가. 미련한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고 좁은 입술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 중에 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정을 입은 자가 된 것 역시 신묘막측(神妙寞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 쓸모나 가치도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한 자녀로, 그의 신부로 세워주셨으니 감사, 감사, 그리고 또 감사할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4. 인간의 육체는 물에서 나온 흙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부드럽고 고운 흙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물과 흙을 가까이 할수록 친근감이 느껴지고 건강해진다. 인간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물과 흙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도 물만 보면 참 좋아하는 이유는 어린 생명체가 형성(形成)되어 10달 동안 어머니 뱃속 양수(羊水)에서 살다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처음부터 물에는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즐거워하며 그 속에 들어가서 놀고 싶어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아기가 자라는 모태의 양수는 오염되지 않도록 임신부의 몸에서 자동으로 하루에 두 번씩 갈아주므로 아기가 잘 성장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 태어난 자녀들이 괴로움이나 고통을 당할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옛날 어머니 몸속에서 함께 살았던 그 때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다.
또 아이들이 흙에 뒹굴며 놀기를 좋아하고 흙에서 자라나는 아이가 건강한 것은 인간의 재료가 흙이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흙에서 나온 몸은 흙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흙 속에서 뒹굴며 놀고 자라나는 시골 아이들이 더 튼튼하고 면역(免疫)도 강하다.
옛날에는 약이 없을 때 손에서 피가 나면 마른 흙을 발라 지혈(止血)시키면 덧나지 않고 금방 낫는다. 역시 흙은 흙끼리 자연적으로 친숙하고 잘 조화를 이루게 된다. 실제로 흙을 멀리하면 건강에 면역성이 약해져서 허약 체질이 된다. 그러므로 지구의 오대양 육대주는 몸의 오장육부(五臟六腑)와 같다고 한다.
지구 속이 뜨겁듯이 우리 심장도 뜨거우며, 지구의 물이 70% 이상인데 우리 인체도 70% 이상이 수분이다. 기름, 철, 인 등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 체질 안에 다 들어 있으니 우리 몸은 흙으로 만든 것이 확실한 것이며 몸은 작은 지구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25-28).

수를 시험하기 위해 찾아온 자들을 보면 마태와 누가는 한 율법사라고 하였고 마가는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들이 질문한 내용을 보면 마태는 큰 계명에 대하여 질문하였고(마 22:34-40), 마가는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하였으며(막 12:28-34), 누가는 영생 얻는 방법을 각각 조금씩 다르게 질문하였으나 예수님은 똑같은 대답을 그들에게 하였다. 그들의 질문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 속에 숨겨진 뜻이 무엇인지 주목해 보아야 한다. 율법사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구약 율법의 이론(理論)을 강론하거나 해석하며 백성들을 지도하는 자들이다. 또 이들은 사법권과 행정권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 중에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 기관에 종사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율법사는 자기의 직위나 생활에 대해 부족한 것도 없고 진리에 갈급하지도 않으면서 단순히 시험할 목적으로 예수께 나와서 영생을 얻는 행위 조건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율법에 기록된 내용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고 반문을 하였다. 율법사는 신명기 6장 5절에 몸과 마음과 생명까지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레위기 19장 18절에 이웃을 사랑하되 자신의 몸과 같이 하라는 두 성경 구절로 대답하였다. 율법사는 왜 신명기에 있는 말씀과 레위기에 있는 말씀으로 예수께 대답하였을까? 자기가 율법에 대한 지식이 능통하다는 것을 예수께 과시(誇示)하고 싶어서 한 말인지는 몰라도 예수께서 네 대답이 옳다고 인정하시면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 다음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다.

1. 이웃 사랑과 영생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과 관계된다고 말을 할 때에 어떤 이웃을 두고 말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ἀγαπήσεις(아가페세이스) κύριον(퀴리온) τὸν(톤) θεόν(데온) σου(수)
사랑하라 주 (그) 하나님을 너의
καὶ(카이)τὸν(톤)πλησίον(플레시온)σου(수)ὡς(호스)σεαυτόν(세아우톤)
그리고 (그) 이웃 네 같이 네 몸과


영생을 얻는다는 조건 중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있겠는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 문제에 관계된다면 과연 그 이웃이 누구란 말인가?
만약 이웃을 물질로 돕고 희생적인 사랑을 할 때에 영생이 우리에게 이루어진다면, 개척교회(開拓敎會) 목사나 선교하는 분들은 생활의 여유가 없이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며, 그러다 보니 돕기는커녕 오히려 도움만 받고 사는 형편이니 그들에게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사는 어려운 이웃에게 물질이 있어서 구제를 하면 좋겠지만 없어서 못한다면 영생에 대한 소망을 접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현실의 생활에만 집착(執着)한 나머지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하고 이웃 사랑은 막연히 세상적인 구제 활동으로만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이웃 문제를 거론할 때에 우리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이웃의 의미를 등한히 여긴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형제 간의 사랑이나 이성 간의 사랑뿐 아니라 부자지간에도 이 땅의 사랑은 한계(限界)가 있는데 어떻게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자가 있겠는가?
인간의 사랑은 손익(損益) 계산을 앞세운 사랑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손해 보는 사랑은 하지 않는다. 이 땅의 사람은 이익이 있을 때만 사랑이 성립되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랑을 장사꾼 사랑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부부 간의 사랑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성경에는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이웃은 보통 이웃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다. 영생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과 똑같이 이웃에 대하여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된다고 하는 단서를 붙여 놓았다.
사실 부모나 처자식에게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가 없는데 어째서 주님께서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였을까(눅 10:25-28)?
이같은 사랑은 우리의 현실 생활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식구도 내 몸같이 사랑을 못 하는데 가족이 아닌 다른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영생과 관계되는 사랑이라고 하지만 누가 이 사랑을 자신 있게 계속 실천하겠다고 대답할 수가 있겠는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次元)에서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 뜻에 접근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계속 모르는 상태로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게 된 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을 찾아서 사랑을 해야만 된다.

2. 가장 큰 두 계명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4-40). 1)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고 물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綱領, κρέμαται 크레마타이)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설명하면서 묻지도 않은 둘째 계명의 이웃 사랑을 연결하여 말씀하셨는데 여기에도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마 22:35-40). 첫째 되는 큰 계명에 들어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둘째로 큰 계명 속에 들어 있는 이웃(πλησίον 플레시온)은 누구라는 것일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법은 가장 큰 계명이 될 수가 있고 당연한 일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형식(形式)이나 외식(外飾)이 있을 수 없고 진심으로 그분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계명 안에 들어 있다고 하는 둘째 계명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나님 사랑에 목숨을 바친다면 순교(殉敎)가 될 수 있겠지만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과 같이 하라는 것은 납득(納得)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기 부모 형제나 처자식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기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하라고 하시니 도대체 무슨 비밀이 담긴 이웃이기에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중에 숨겨진 이웃을 찾아보고 그분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2) 두 계명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의 법이다
ἐν(엔)ταύταις(타우타이스)ταῖς(타이스)δυσὶν(두신)ἐντολαῖς(엔톨라이스) (안에) 이 (그) 두 계명들 ὅλος(홀로스) (호) νόμος(노모스) κρέμαται(크레마타이) 온 (그) 율법 강령이니라(매달다. 걸려 있다)
모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πλησίον플레시온) 사랑이라고 하였다. 또 첫째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둘째는 첫째와 똑같이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으니 이 두 최고 계명의 주인공(主人公)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나눌 수 없는 두 큰 계명이라고 하면서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大綱領)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마 22:40)? 강령(κρέμαται 크레마타이) =‘묶어 놓다, 매달아 놓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율법 안에서나 선지자의 말씀 속에서도 큰 계명이므로 뗄 수 없도록 함께 묶여(매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계명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둘째 계명은 똑같이 큰 계명이니 분리하거나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계명이란 말씀이다. 원인과 결과가 떨어질 수 없듯이 뿌리와 열매의 관계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란 것이다. 주님께서 이 시간에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가장 큰 두 계명이 묶여진 이유를 물으시고 또 잘 지키고 있느냐고 질문을 하신다면 자신 있게 설명하면서 대답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계명은 성도들이 지킨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거리낌 없이 고백(告白)할 수도 없고 두 계명이 묶여진 이유 역시 설명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향한 사랑의 계명도 완벽(完璧)하게 행한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어떻게 세상 이웃을 하나님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솔직하게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하겠지만 부모, 처자, 가족은 돌아보지 않고 이웃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고 목숨을 바쳐 사랑한다고 하는 자는 지금도 없거니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웃이 누구인 줄을 모르고 생명을 바쳐 사랑할 자가 있겠는가? 만약 사랑할 이웃을 알았다고 하여도 어떻게 하나님 사랑과 같은 사랑을 할 수가 있겠는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이 다하기까지 꾸준히 사랑을 하면서 모든 것을 의논하고 또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 맡기기도 하지만 이웃에 대하여는 그처럼 계속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다가도 멀리하고 돕다가도 지쳐서 중단하게 되는데 이같은 사람들이 이웃에 대하여 생명을 걸고 사랑한다는 것은 무모(無謀)한 행동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할 수 없는 일을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특히 시험하기 위하여 찾아온 자에게 책(責)잡힐 말을 했겠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생 문제는 율법사가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숨겨져 있는 이웃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3. 첫째 되는 계명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辯論)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燔祭物)과 기타 제물(祭物)보다 나으니이다”(막 12:28-33). 1) 첫째 계명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막 12:28-34)?
ποία(포이아)ἐστὶν(에스틴)ἐντολή(엔톨레)πρώτη(프로테)πάντων(판톤) 무엇 이니이까 계명 중에 첫째 모든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을 한 사람은(마태는 율법사라고 기록하였고 마가는 서기관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함) 예수께 와서 큰 계명과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였다. 예수께서는 첫째 마음을 다하고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이곳에서도 역시 묻지 않은 둘째 계명까지 묶어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똑같이 사랑을 하면 이것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였다(마 22:39).
ὁμοία(호모이아) αὐτή(아우테) ἀγαπήσεις(아가페세이스) τὸν(톤) 동일한(같은) 이것(그것) 사랑하라 (그) πλησίον(플레시온) σου(수) ὡς(호스) σεαυτόν(세아우톤) 이웃을 네 같이 네 몸과
주님이 말씀하신 두 가지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어느 하나도 소홀(疎忽)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과 이웃이 큰 계명 안에 동일하게 들어 있는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고 둘 다 똑같이 사랑하라고 한 그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닌가?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과 이웃을 동일(ὁμοία αὐτή)하게 사랑하라는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2) 둘째 계명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첫째 계명과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둘째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보다 귀한 것이라고 했다. 위의 문장 내용 중에 둘째 계명에서 이웃 사랑을 보면 명령법과 현재 능동태로 되어 있어서 반드시 하나님과 이웃을 자기 스스로 계속해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따로 나눌 수 없이 이웃도 함께 똑같이 사랑을 해야 된다는 것을 법으로 정해 놓았다. 그리고 또 첫째 계명(하나님 사랑)과 둘째 계명(이웃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전체 드리는 번제물(燔祭物)보다 또 기타 제물(祭物)보다도 더 나은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웃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와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그리고 안식일, 상번제(常燔祭)에 드리는 모든 제물보다 이웃 사랑이 더 낫다고 한 것은 예사로운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2장 8절에도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어째서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이 되고 가장 으뜸이 되므로 제물보다 더 낫다고 하는가?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φιλέω 필레오)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φιλέω)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기 식구보다도 이웃을 더 사랑(ἀγάπη 아카페 → ἀγαπάω 아카파오에서 유래)하라고 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석해 보면서 눈에 보이는 이웃, 내 주위에 있는 이웃 외에 감춰진 이웃이 누구인지를 다른 각도에서 찾아야 한다. 이와 같이 깊이 숨겨진 귀한 이웃을 반드시 찾아서 마음과 뜻(계획, 목적, 사상)과 목숨(생명)을 다하고 힘(능력,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사랑(ἀγαπήσεις)하라는 큰 계명대로 실천(實踐)해야 할 의무(義務)가 우리에게 있다고 하였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영생 문제를 묶어 거론한 것만 생각해 보아도 세상 이웃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그 이웃 되시는 분을 사랑할 때에 영생을 갖게 된다고 하니 윤리나 도덕적으로 나누는 교제와 사랑을 말하는 이웃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세상적인 사랑은 이웃에게 아무리 베풀었다고 해도 영생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세상적인 구제와 사랑은 불신자나 이교도들이 더 잘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성경을 더 깊이 보지 않았을 때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죽을 때 영혼이 구원을 받아 천당에 가는 것으로도 감사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좋은 구원과 영생을 사모하고 찾아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과제가 된다. 물론 죽음 이후에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이제 성경이 말하는 이웃을 찾고 영생을 얻는 과정을 확실히 알게 된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그 분의 뜻을 따르고 순종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기뻐하시게 될 것이다.

4. 누가 우리의 참 이웃인가

지금까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할 때에 이웃에 대한 개념을 얼핏 생각하면 가장 가까운 아내를 위시하여 집안 식구들을 참이웃이라고 여겼고, 더 확대한다면 내 주위에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저 사회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면서 평범하게 서로 만나는 사람들이라고만 여겨왔다. 그 이웃 외에 다른 이웃이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이웃이라면 항상 육신적인 이웃이 우리의 머리 속에 잠재되어 그 생각이 굳어졌기 때문에 달리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세상 윤리(倫理)와 도덕적(道德的)인 차원에서 주위에 있는 가난한 자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으로만 이해해 왔을 뿐 성경 속에 숨어 있는 다른 어떤 이웃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웃 사랑은 인간 관계에서 어려운 사람에게 물질로 돕는 구제나 봉사 활동 정도로 생각하고 그런 것을 실천할 때에 자부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 그 이웃의 근본 뜻을 성경 말씀 안에서 바로 알고 다른 차원에서 이웃을 찾아야 한다. 만약 그 이웃을 발견하였다면 몸과 마음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다 바쳐서 그분을 사랑하여 약속하신 영생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 되고 두 계명은 떨어질 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한 번만이라도 되새겨 보았다면 어떤 답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 속에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와 영생이 서로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만 생각해 보았어도 세상적인 이웃이 아닌 것을 알고 다른 방향으로 한 번 찾아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이웃에 대하여 달리 생각해 보지를 못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사랑할 이웃이 누구이겠는가? 예수께서 당신을 두고 우리의 이웃이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을 지금까지는 전혀 몰랐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하게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영생을 얻을 수가 있다고 했을 때에 즉시 알아차릴 수가 있어야 하는데 깨닫는 것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사랑받을 이웃을 지칭(指稱)하실 때에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항상 윤리와 도덕적인 이웃을 생각하다 보니 주님이 말씀하신 참이웃의 근본 뜻이 묻혀 버렸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안다”는 단어인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체험하는 가운데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인데 이 땅위에 성육신하여 오신 그분과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고 깊이 사랑하는 것이 영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무지한 인생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참이웃이라는 것을 직접 알려주셨으면 혼선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웃 되시는 주님을 하나님과 같이 사랑하였을 것이다.
성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성자 하나님께도 같은 사랑을 해야 된다고 한다면 누가 반대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 이웃과 우리가 생각했던 이웃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뜻밖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처음에는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사람으로 이 땅에 와서 자기를 낮추어 이웃으로 접근하였으니 문자 안에서 생각되는 세상 이웃을 생각하다가 차원이 다른 이웃인 그리스도를 쉽게 깨닫지 못하였다. 하나님 사랑은 강조하셨으나 자신은 나타내지 않고 이웃이라는 글자 속에 숨겨 놓고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누가 눈치를 챌 수가 있겠는가? 지금까지는 아무도 감(感)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영생에 대한 질문 앞에 이웃 사랑을 하라고 하신 주님의 뜻을 조금만 신경을 쓰고 생각해 보았더라면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 중에 하나님과 분리해서 사랑할 수 없는 분이요, 영생을 가지고 계신 이웃이라고까지 말씀하였는데도 우리들은 모르고 있었다. 예수님 자신이 직접 이웃이 누구신지를 소개하셨지만 우리들은 다른 쪽으로 생각을 집중하다 보니 직감(直感)적으로 바로 깨달을 수가 없었고 찾아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웃을 세상적으로만 생각하고 다른 방향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육신의 지혜로는 찾을 수가 없었고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 진리 안에서 영적으로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보일 듯이 들릴 듯이, 가깝게 그리고 아주 가깝게 계셨으나 눈이 가리워지고 귀가 둔하여졌기 때문에 정확히 못 보고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을 뿐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같은 분인데 다만 성자 하나님 자신은 죄인을 살려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의 몸을 입고 오셨고 또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표현해 주셨으니 오늘 우리에게는 얼마나 친근감이 있는 이름인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고 나면 이 두 분에 대한 사랑은 나누어서 할 수가 없고 따로 떼어낼 수도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강령(κρέμαται 크레마타이, 묶어 놓다)이라고 한 뜻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나누지 말고 이 두 분을 사랑할 때에 어느 한 쪽을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해도 안 되고, 똑같이 함께 사랑을 해야 영생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신 뜻도 깨닫게 될 것이다. 범죄하므로 하나님과 원수된 자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피의 공로를 입혀 하나님의 친자녀로 삼으시고 아들의 기업을 함께 누리게 하신 그 은혜를 잊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은 가장 큰 계명이요 함께 묶여져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뗄 수가 없다는 이유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참이웃인 예수 그리스도 이 두 분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사랑을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나를 살려 주신 예수,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주신 그 예수, 하나님의 친자녀로 삼게 하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제물보다 낫다고 할 수밖에 없다.

5. 참이웃을 감추어 놓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첫째 계명에 대한 사랑은 직접적으로 설명하면서 둘째 계명인 이웃에 대한 사랑은 예수 자신이기 때문에 숨겨 놓으신 것이다. 만약 시험하는 율법사 앞에서 하나님과 예수 자신을 똑같이 사랑해야 영생을 얻게 되고 이것이 큰 계명이라고 했다면 아마도 율법사는 돌을 들어 치려고 하였을 것이다. 지혜로우신 주님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만은 나타내시고 자신은 이웃 속에 감추어 놓았기 때문에 율법사와 서기관뿐 아니라 지금까지 참이웃을 찾지 못하였고, 깊이 숨겨진 것도 아닌데도 알지 못하였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부부지간이나 부자(父子) 사이에도 내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不可能)한 일인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다른 각도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하나님과 이웃은 묶어 놓았다고 하였고, 하나님 사랑은 큰 계명이요 이웃 사랑은 둘째 계명이라고 한 것을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았더라면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보다도 낫다고 한 것이나,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면 영생할 수 있다고 한 것을 한 번 깊이 생각만 해 보았더라면 감추어진 이웃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가 있었을 텐데 전혀 느낌도 없었다.
혈연관계(血緣關係)에 있는 사람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데 주님께서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과 같이 하라고 하신 이유를 지금까지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 율법사에게 감추어 놓은 이웃이 오늘날까지 나타나지 않고 숨겨져 있으나 이제 밝히 말할 때가 왔다.

6. 성경 문자 속에 나타난 이웃

구약 속에 나오는 이웃 사랑은 문자 그대로 나의 주위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רֵעַ 레아흐, 동료, 벗, 친구)을 말하고 있는데 173회나 사용되고 있다. 구약 성부시대는 영적인 축복보다는 모든 것을 육적으로만 말씀하였다. 특히 율법은 윤리적인 면과 도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으나 신약 성자(聖子)시대에는 육적인 것보다 말씀 내용을 영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더 많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잘못하면 해석상 오류(誤謬)를 범할 수가 있다. 그 한 예가 바로 “이웃”이라는 단어이다. 육적인 이웃이 영적으로 바뀌고 육신의 만나가 영적으로 말씀의 만나가 되어지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웃이란 단어는 두 종류가 있다. 그 의미는 비슷하면서도 각각 다르게 쓰인다. 1) 플레시온 이웃을 말할 때에 플레시온(πλησίον)과 게이톤(γείτων)이란 단어가 있는데 ‘플레시온’은 남성명사 단수로, ‘게이톤’은 여성명사 복수로 나온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이웃이라는 말이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르게 쓰이고 있다. 플레시온이라는 단어가 신약에는 18번 나오는데 그 중에 16번은 남성명사 단수로 나오고 2곳이 형용부사 또는 전치사로 나오고 있다. 남성명사 단수로 나오는 이웃(πλησίον)은 마태복음 5장 43절, 19장 19절, 22장 39절, 마가복음 12장 31절, 12장 33절, 누가복음 10장 27절, 10장 29절, 10장 36절, 로마서 13장 9절, 13장 10절, 15장 2절, 갈라디아서 5장 14절, 에베소서 4장 25절, 야고보서 2장 8절, 4장 12절, 사도행전 7장 27절(동무)에 있다. 형용부사나 전치사로 나오는 이웃(πλησίον)은 히브리서 8장 11절(나라. 사람)과 요한복음 4장 5절(가깝고) 두 곳이다. 신약성경에 이웃으로 나오는 플레시온(πλησίον)은 공관복음뿐 아니라 여러 서신서에도 남성명사 단수로 나온다. ‘이 땅위에 하나밖에 없는 남자’, ‘그 분’이 나의 이웃(πλησίον)이라면 누구이겠는가? 나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괴로움과 고통을 함께 해 주고,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신 그 분, 이 땅위에 둘도 없는 그 예수가 나의 참이웃이 아니겠는가? 죄 많은 이 땅에 오셔서 죄를 담당하여 대신 죽으시고 새 생명을 주신 주님은 외로울 때에는 친구가 되어 주시고 괴로운 일을 만났을 때에는 함께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항상 내 곁에서 역사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나의 이웃이기에 그분을 하나님과 같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첫째로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죄와 허물을 용서하신 이웃(예수 그리스도)을 위해서도 나의 몸과 마음과 생명을 걸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도록 두 계명을 함께 묶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계명은 나눠질 수도 없고 떼어 낼 수도 없는 사랑이며 이 사랑은 율법에서도 선지서에서도 가장 큰 계명이라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8절에서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이 된다고 한 말씀의 참뜻 속에 이웃 사랑과 영생 문제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나의 이웃이 되는 남자, 이 분은 아내보다도 더 사랑하고 부모나 자식보다도 더 사랑해야 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대상을 직접 공개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표현하시면서 가장 가까운 이웃(πλησίον)이라는 단어 속에 예수 자신을 숨겨 놓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알게 될 자에게만 나타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묘략인 것 같다. 숨은 그림 찾듯이 살짝 감추어진 그 이웃을 이제 바로 알고 깨닫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感激)스러운가? 내가 꼭 만나야 되고 사랑해야 할 그분을 찾아 헤메다가 만났다면 그 기쁨은 비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성경 말씀 속에 이웃을 숨겨 놓고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라고만 했을 때에 그 뜻을 알기에는 너무나 막막하고 어려웠으나 이제 그 깊은 뜻을 깨닫고 이웃을 발견했을 때에는 하늘의 보화를 자신만이 소유한 느낌이 들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참이웃을 함께 발견한 여러분들도 같은 감격이 있으리라 믿는다. ① 참이웃의 대한 비유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浮費)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慈悲)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0-37). 앞의 설명에서 이웃이 누구인가를 말했지만 객관적(客觀的)인 입장에서 어떤 사람이 참이웃이 되느냐는 것을 강도 만난 자의 비유에서 확실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무서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세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가게 된다. 하나님과 제사의 관계를 맺고 생명을 살리는 귀한 직책을 가진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므로 강도 만난 자의 참이웃에서 탈락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먼저 죽음에 직면한 사람을 급히 살려야 할 사명과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자신도 급히 피하여 지나감으로 하나님 앞에 책망받을 행동을 하였다. 또 둘째로 제사를 돕고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레위인도 당연히 생명을 살리는데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치므로 이웃이 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한 행동은 용납될 수가 없다. 그 다음 세 번째 사람은 천대받고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으로서 여행하는 중에 그를 보고 자신의 위험을 감수(甘受)하면서까지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는 희생적인 사랑을 하게 되므로 참이웃이 되었다고 하였다. 강도 만난 현장에서 두려움을 무릅쓰고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에 붓고 싸매며 응급치료를 한 다음 나귀에 태우고 주막에 데리고 가서 주막 주인에게 그를 잘 돌봐 줄 것을 부탁하고 부비(浮費, 환자에게 드는 비용)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했다. 주님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지 물으셨다. 이 세 종류의 사람 중에 강도 만난 자의 참이웃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생명을 건져주고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했을 때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다(37절). 이 비유에서 강도는 사탄을 상징하며 핍박과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상징하였고, 주막은 오늘의 교회를 상징하며 강도 만난 자는 신앙의 상처 입은 하나님 백성을 말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면서 멸시하고 천대하였다(요 8:48). 강도 만난 자는 이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귀인 사탄에게 기습을 당하여 물질과 생명의 피해를 입음으로 사업이 무너지고 가정이 파탄되기도 한다. 때로는 건강의 습격을 받아 질병의 고통으로 사경을 헤멜 때도 있고 가까운 동료의 모함으로 명예에 치명타를 입고 삶의 의욕을 잃을 때도 있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 살 소망을 잃고 죽음의 골짜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가 강도 만난 자이다. 주님은 낮고 비참한 곳까지 찾아오셔서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죄악에서 죽게 된 자를 구출하여 살려 주시는 역사를 강도 만난 자의 비유를 들어 참이웃이 주님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택한 백성이 사탄의 기습을 받아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고통당할 때 나를 못 본 체하지 않고 찾아와서 당신의 피와 말씀으로 싸매주시고 주막인 교회까지 인도하여 놓고 가시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해 주신 것이다. 사죄의 은총과 큰 구원의 축복을 허락해 주시고 또다시 돌아오는 재림의 아침을 기약(期約)하고 떠나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땅에 다시 찾아오실 주님만이 진정한 나의 참이웃이기 때문에 오늘도 주막인 교회에 엎드려 다시 만나 뵙기를 눈물로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이웃의 개념이 이제 확실히 바뀌게 되었다면 보다 더 신앙의 성장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나의 참이웃을 위해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생명까지라도 바쳐 사랑하며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신 그 분을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또 우리도 사랑의 빚을 보답하기 위하여 강도 만난 주의 백성을 찾아 주막집인 교회로 데리고 와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치료를 하고 주인이 올 때(재림)까지 보살피고 살려야 한다. 참된 주의 종은 신앙에 상처를 받아 죽게 된 자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치료하여 주님의 뒤를 따라 새 생명 안에서 영생하도록 힘을 쏟는 자가 되어야 참이웃의 길에 동참(同參)하는 자가 된다. 영생도 모르고 내세도 없이 금수(禽獸)와 같이 살아가는 나에게 이처럼 하늘의 복을 주셨으니 그 은혜를 영원토록 감사하며 사랑으로 보답해야 한다. 나의 죄를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만 가지의 고난을 다 당하고, 나를 살려주신 그 분에게 목숨이 아까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내가 찾은 참이웃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토록 사랑하며 그분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의 빚진 것을 갚아야 한다. 육신의 몸을 가진 내가 세상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었지만, 살 찢고 피 쏟아 나를 구해 주신 그분에게는 내가 사랑의 빚을 얼마나 졌는가를 생각하며 이 생명을 주께 바쳐 사랑으로 보답을 해야 한다. 나의 죄값은 내 자신이 치루면서 죽어야 할 것인데 이제 우리 대신 죄값을 담당해 주신 그 분의 뜻을 받들어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할 의무를 느끼고 그분의 뜻을 따라 말씀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순종해야 된다. 내가 사는 목적이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사는 삶이 되어야 하고 나의 사업과 배운 지식과 모든 가정생활까지 참이웃인 주님을 위한 길이 되어야 한다. 죄로 인해 멸망받아 지옥불에 가야 할 나를 찾아와서 살려주신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사랑이 아닌가? 그 사랑을 아낌없이 주신 분이기에 이 큰 빚을 조금씩이나마 갚기 위하여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상처받은 자를 치료하며 사명을 주신 그분에게 날마다 충성으로 보답하며 살아가도록 힘써야 한다. 지금까지 받은 사랑도 감사한데 주님께서는 또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유업을 준비하시고 이 못난 자를 위하여 왕궁 도성까지 예비해 놓고 나를 찾아오신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그 분을 어찌 소홀히 생각할 수가 있겠는가? 내 자신뿐 아니라 아내와 자식까지 힘과 정성을 합쳐서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의 빚을 다 갚을 수가 없고 측량할 수도 없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좋은 이웃을 만나 참사랑을 알고 405장의 찬송을 음미(吟味)할 때 또다시 마음이 뜨거워질 것이다. 못난 죄인을 살리시려 이 땅에 오신 주님! 항상 내 곁에서 힘과 용기를 주셨고 따뜻한 손길로 이끌어 주시며 위로하신 주님! 이 땅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의 진정한 이웃이 되셨으니 내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돈을 버는 목적까지 그분을 위하여 쓰도록 생각이 바뀌게 되고 기술을 배우고 후계자를 양육해도 전부 그분을 사랑하기 위한 일이 되어야 하겠다. 플레시온(πλησίον), 즉 “이웃”이라는 이 단어를 읽을 때마다 머리 속에 주님이 떠오르고 마음이 감격(感激)해질 것이다. 나의 이웃이 되신 그 분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겠다는 의지(意志)가 생기고 실천(實踐)으로 옮길 때 신앙의 역군(役軍)이 되고 주님의 뒤를 이어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게 된다. 살았으나 죽은 자였던 나를 불러주시고 조건 없이 사랑해 주셨고 영생을 약속해 주셨으니 그분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도록 살아가야 하겠다. 가실 때 다시 찾아오시겠다고 재림을 약속해 주셨으니 그 이웃에 대하여 변함없는 사랑으로 꿋꿋이 기다려야 할 것이다. 참이웃(πλησίον)인 그분의 뒤를 따라 천국의 기업을 바라는 자는 남편의 핍박 속에서도 교회를 찾고 환경의 어려움과 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주께 나와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며 사모하게 된다. 나의 삶의 전부요 생명의 원천(源泉)인 그분에게 무엇을 드려 보답하겠는가?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친다는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참이웃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다가 자기 가족과 재산도 포기하고 신앙의 정절(貞節)을 변함없이 지키다가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이제 신앙이 장성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내 이웃이 된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토록 사랑하며 힘닿는 데까지 충성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로마서 15장 2절에 우리의 사는 목적이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려 한다고 했는데도 그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우리가 아침에 눈 뜨고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기쁘게 해 드릴 이웃이 누구이겠는가. 이제는 막연한 이웃을 찾지 않게 되었고 확실한 이웃을 알게 되었으니 마음 속 깊이 감사하면서 사랑의 실천으로 그분께 보답해 드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앙사상(信仰思想)을 가지고 다시 오시는 나의 참이웃인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린다면 그 주님이 오실 때에 반드시 나를 찾아주실 것이다.
② 이웃과의 사이는 본체와 지체 에베소서 4장 25절에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肢体)가 됨이니라”고 할 때에도 그 이웃이 주님인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이제 우리의 이웃 되시고 몸체가 되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영광을 얻으실 때가 되면 주님을 사랑하던 지체도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된다. 몸체가 없으면 지체는 아무 가치도 없고 자기의 일을 찾아 할 수 없게 된다. 몸체의 필요에 따라 지체가 활동을 할 때에 환영을 받고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고 몸체의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몸체가 없으면 지체는 아무 가치도 없다. 그러므로 지체는 몸체와 떨어질 수가 없고 나누어질 수가 없다. 만약 나누어진다면 지체는 죽게 된다. 왜냐하면 몸체에서 지체로 통하는 신경이나 피와 열의 모든 에너지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지체의 체온이나 신경뿐 아니라 피까지 항상 몸체에서 계속 공급을 받고 조절을 받아야 한다. 몸체가 거룩할 때 지체도 거룩해야 하고 몸체가 말씀으로 역사할 때에 지체도 그 말씀 안에서 같은 역사로 일치가 되어야 한다. 몸에 붙어 있는 지체끼리 서로 사명이 다르다고 다른 지체를 비방하거나 대적할 수는 없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또 몸체가 되기 때문에 지체인 우리가 몸체 앞에 외식과 거짓이 없는 행위와 솔직한 대화를 해야 하고 그분 앞에 위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야고보서 4장 12절에 “입법자(立法者)와 재판자(裁判者)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대로 진행하실 때 인간은 시비나 불평을 할 수가 없다. 미련한 인생의 생각이 모자라서 입법자가 되시고 재판관이신 이웃을 잘못 판단하므로 실족할 때가 많다. 나의 이웃이 되시는 주님 앞에 인간의 생각대로 결정하여 판단하거나 거짓을 말하는 것은 큰 실수가 되므로 조심하며 삼가해야 한다.
이사야 33장 22절에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하여 분명히 입법자와 재판장이신 이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로마서 13장 9절과 10절에 “간음하지 말라(7계명), 살인하지 말라(6계명), 도적질하지 말라(8계명), 탐내지 말라(10계명)고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πλησίον)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하였으나 여기에서도 이웃은 육신적인 이웃이 아니라 생명을 버리고 죄인 된 나를 살려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이웃(πλησίον)이 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주님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는 사랑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의 완성이요 그분의 법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영생의 지름길이 된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주님 앞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악이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면서 세상과 간음하는 행동을 일삼고 그분의 뜻을 저버리는 범법 행위가 악이라는 것이다. 참이웃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을 걸고 사랑하는 자는 악을 행할 수가 없고 거짓과 불의를 용납할 수가 없다. 나의 이웃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완성하는 자요 모든 계명과 말씀을 이루게 되고 모든 죄의 법까지도 다 이길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참이웃인 예수 그리스도를 내 몸같이 사랑하게 되면 그분께서 부탁하신 뜻을 기쁘게 순종하며 섬길 수가 있다. 사랑하는 그분 앞에서 어떻게 이방과 타협하는 간음을 할 수 있겠으며, 주님의 백성을 살인하거나 주님의 것을 도적질할 수 있겠는가? 이웃이 누구인 줄을 바로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괴로운 시험이 와도 이길 수가 있고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참을 수가 있다. 모든 계명을 순종하고 이웃인 주님을 사랑할 때에 율법을 완전히 이루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나타내는 이웃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 될 수가 없다. 이 땅위에서 참이웃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찾으면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먼저 아시고 때를 따라 도와주시고 지켜 주시며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것이 없다.
저자는 늦은 감이 있지만 숨겨진 이웃을 바로 깨닫게 되었을 때에 마음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나 고마운 분을 이제야 알았기에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어서 제단 앞에 엎드려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허물 많은 죄인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말씀을 읽었어도 딴전을 피운 것 같고 이웃을 보았으나 어리석고 우둔하여 미처 알지 못한 죄인이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나태한 죄인의 용서를 눈물로 간구하며 지나간 과거를 고백하면서 예전에 미처 몰랐노라고, 미련하여 찾아보지 못했다고 직고(直告)할 때에, 주께서 나의 손을 잡아 넘치는 힘과 용기를 주셨다. 이렇게도 못난 나를 찾아 주셨고 사랑해 주셨는데 진실을 버리고 거짓을 말할 수가 있겠는가? 죽도록 사랑하고 끝까지 그 은혜에 보답을 해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주께서 지금까지 왜 이렇게 깊이 숨어 계셨는지 만나 줄 자에게만 나타나시기 위함인가!
너무나 무지하여 못 찾았을 뿐인가! 너무 늦게 알아본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송구스럽고 죄송할 뿐이다. 그러나 매달려 보고 싶은 이웃, 그 품에 안겨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슴이 뭉클해진다. 감격한 마음, 누구와 비교할 자 없고 변함없는 감사와 사랑을 고백하면서 끝까지 사랑할 분이기에 저 천국에 가서라도 그분 손목 꼭 잡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리라 다음은 저자가 찾은 이웃 앞에 감격하여 감사하면서 맘에 감동되는 대로 옮겨 본 글이다.
숨겨진 이웃은 그리스도 내 곁에서 항상 살펴주시고 광야같은 세상에서 길이 되어 주신 이웃 따뜻한 손길로 잡아주시고 용기를 주시던 그 큰 사랑 사탄의 손에서 해방시켜서 친자녀 삼아주신 나의 주 예수 내 몸같이 사랑할 맘 결심하였네.
하나님 사랑과 그리스도 사랑 나눌 수 없는 두 큰 계명이라 알려 주셨고 하나님 사랑이 첫째 큰 계명 그리스도 사랑이 둘째가 되네 창조주 사랑을 나타내셨고 그리스도 이웃은 숨겨두신 뜻 호모이아(ὁμοία) 아우테(αὐτή) (첫 계명과 동일하다) 그 뜻을 알았네.
제사와 제물보다 으뜸 사랑은 이웃 사랑 최고의 법 알려 주셨고 뺄 수 없고 나눌 수 없다 하신 그 뜻 두 계명 묶음 속에 숨겨진 이웃을 율법 속에 숨겨 놓고 찾게 하셨고 선지자의 글 속에도 감춰 놓았네 크레마타이(κρέμαται) 묶어 놓으신 뜻 이제야 알았네.
소경 같은 눈이 열려 찾은 이웃은 가까이 내 곁에 아주 가까이 하늘의 떡이라고 먹여 주셨고 영생 가진 이웃이라 알려줬건만 귀넘어 들었기에 그 뜻을 몰랐네 언덕 넘어 있는 이웃 잘못 찾아도 철들어 알 때까지 기다리셨네!
2) 게이톤 지금까지 플레시온(πλησίον)이라고 하는 남성명사 단수인 예수 그리스도 이웃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나 성경에서는 일반적인 이웃인 게이톤(γείτων)이라는 단어도 신약성경에 4번 정도 나온다. 여성명사 복수로 우리 주위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의 이웃이 되는 “게이톤”이란 단어는 이 땅위에서 내 주변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을 이웃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웃에게는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든지 또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나 큰 계명이 된다든지 강령이란 말도 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 대 인간, 육신과 육신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웃(γείτων)은 서로 사랑할 때에 영생이나 가장 큰 계명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다만 함께 공동생활을 할 때 피차 상부상조(相扶相助)할 뿐이다. 이와 같이 이웃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리고 성경에 나타나는 이웃을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을 알게 될 때부터 이웃을 보는 생각이나 개념(槪念)이 달라지고 자신의 성숙된 신앙을 알 수가 있고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날까지 우리가 성경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이웃에 관한 문제였다. 이웃이라는 단어는 너무 익숙하고 친근해서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이웃에 대해서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모순(矛盾)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참이웃에 대하여 바른 뜻을 깨닫고 이웃 사랑과 나의 관계를 정립하고 주께서 맡겨주신 양들에게 말씀으로 잘 가르쳐서 교파(敎派)를 초월(超越)하여 한국 교계를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뜻을 모르고 간혹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은 이웃으로 끝나야지 다른 생각은 할 필요도 없다고 말을 하거나 이 모든 것은 말쟁이들이 말을 만드는 것으로만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혹시 뜻을 달리하는 자들이 이웃에 대하여 지나친 해석을 한다고 짜증스럽고 귀찮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이웃에 대하여 더 깊이 성경을 상고해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근본 뜻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 14장 12절에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富)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데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나오는 이웃은 게이톤(γείτων)이다. 또 누가복음 15장 6절에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γείτων)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했고 9절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라고 했을 때는 인간 이웃(γείτων)을 초청하였다. 요한복음 9장 8절에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乞人)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라고 할 때도 이웃은 게이톤(γείτων)이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세상 사람들이다. 나의 이웃(πλησίον)을 위한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대인관계(對人關係)도 문제가 걸리면 안 된다. 항상 서로 신의(信義)를 지키며 참된 교제와 협력을 해야 한다. 3) 보이는 세상 이웃(γείτων 게이톤)도 사랑하자 이웃(πλησίον) 되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가정과 직장을 등한히 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이 땅위에서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는 남편과 아내 사이일지라도 모범(模範)된 가정으로 충실(忠實)한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신앙을 중심으로 합심된 가정이 되어야 가정에서부터 천국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는 남을 존중히 여기고 예수 사랑을 가지고 희생과 봉사하는 맘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항상 나의 참이웃이 베풀어주신 사랑의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며 이방에 본(本)이 되어야 한다. 예수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남에게 마음 아픈 행동은 극히 삼가야 한다. 특히 가깝고 친할수록 생각없이 던진 말 한 마디로 마음의 상처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누구든지 인격적으로 대할 준비가 되어야 하고, 특히 가까운 세상 이웃끼리 물질 관계에는 시험이 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하고 모든 계산이 정확해야 한다. 피차 상처를 입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우리는 대신관계의 이웃(πλησίον)뿐 아니라 대인관계의 이웃(γείτων)에게도 아름다운 교통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항상 자신이 먼저 희생이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이웃(πλησίον)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에 감사해서 나의 주위의 육적인 이웃(γείτων)에게도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 이렇게 이웃을 바로 알고 성경을 볼 때에 감격하여 그분 앞에 더욱 감사가 나오게 되고 성경을 해석할 때 혼란이나 혼선이 없게 된다. 참이웃을 깨닫고 즐거운 마음으로 양떼를 지도하면 주의 종들은 더욱 은혜가 되고 감사와 기쁨이 될 것이다. 나의 이웃인 예수 그리스도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그분도 나를 정다운 이웃으로 반겨 주시고 내 곁으로 찾아와서 어려운 모든 것을 도와주신다. 나의 참이웃인 예수 그리스도가 내 곁에 있을 때에 그 소중함은 세상에 없어질 금은 보화는 비교할 수가 없다. 값진 보화가 되시고 하나밖에 없는 이웃을 소유하게 된 자는 기쁨이 충만하여 큰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한많은 이 세상살이에 참이웃인 주님과 함께 살면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될 것이다. 세상 풍랑이 일어날지라도 두려움이 없는 감사가 나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귀하고 좋은 참이웃을 너무 늦게 찾은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지만 아직도 숨겨진 이웃을 찾지 못한 자가 주위에 많은 것을 볼 때 안타까워진다. 늦게라도 이웃이 되는 주님을 찾은 자는 더 늦어지기 전에 찾은 것을 더욱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그분의 뜻에 따라 충성하고 늘 사랑하면서 이 세상 마치는 날까지 그 이웃과 더불어 더욱 분투(奮鬪)할 각오가 서야 한다. 4) 비유의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마태복음 13장 16절에 의하면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는 제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영적인 소경이요 귀머거리라고 책망하셨다. 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떡을 가지고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셨다(요 6:32-35, 47-52). ② 세상 포도주를 가지고 영생하는 진리의 포도주로 말씀하셨다(사 25:6, 55:1). ③ 세상의 빛을 비유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빛이라고 하셨다(요 1:4, 8:12). ④ 세상에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물이 없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대 필요한 물을 진리로 비유했다. 성도는 진리의 물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요 4:10, 7:37-38). 물도 세상의 물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물이 있다. ⑤ 보화(재물)도 같은 단어를 가지고 세상 보화가 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화로 표현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마 6:19, 마 13:44, 고후 4:7). ⑥ 나무로 비유하실 때도 그 말씀이 그냥 나무인지 사람을 비유한 나무인지를 알아야 한다. 나무도 세상 나무가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무가 있다(시 1:3, 사 5:2,7, 렘 2:21). - 사람을 비유할 때: 삿 9(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가시나무) - 국가를 비유할 때: 단 4:10-12, 사 5:1-7, 마 3:10, 롬 11:17 -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요 15:1 ⑦ 성경에서 세상 이웃도 있고 그리스도의 이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참이웃과 세상 이웃을 잘못 이해하면 이웃에 대한 혼돈이 올 수도 있다. 떡도 세상 떡으로 보면 안 되듯이 좀 생소한 것 같지만 이웃에 대하여서도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는 보는 눈도 있어야 되고 듣는 귀도 있어야 깨닫는 자가 축복을 얻게 된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영생을 놓친 부자 청년은 세상 것에는 부족한 것이 없어도 영의 눈이 어두워진 소경이기 때문에 보화이신 예수 앞에서도 축복을 놓치므로 가장 불행한 자가 되었다. 누가복음 10장 25절에서 세상에서는 막강한 힘을 가진 율법사가 주님께 나왔고 마태복음 19장 16절에서 22절에는 젊고 재력을 과시하는 부자 청년이 나온다. 마가복음 10장 17절에서 22절에는 돈 많은 어떠한 사람으로 나타나지만 이 사람들처럼 세상 물질과 권력 때문에 영생을 포기(抛棄)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율법사와 부자 청년은 세상 영광과 재물에는 눈이 밝았으나 보화(寶貨)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눈앞에 있어도 영생의 보화를 보는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이 이 땅위에 사는 인생들이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나 없어질 물질이나 명예, 또는 환경 때문에 영원한 영생을 놓칠 자가 많이 있게 될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물질을 포기하고 나를 따라오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알려 주셨는데도 귀한 말씀을 듣고 순종할 줄 모르고 돌아가는 것을 볼 때에 세상의 것은 풍요롭게 가지지 못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신이 오히려 감사할 것이다. 만의 하나 자신의 행위를 지나치게 믿는 부자 청년같이 되어 버리면 영생을 눈앞에 두고도 얻지 못하고 축복을 보고도 소유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세상적으로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많을지라도 주님이 불러주시고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따라야 복이 된다. 많은 노력과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따라오라(ἀκολούθει 아콜루데이)고 할 때 뒤돌아보지 말고 즉시 순종해야 한다. 하늘의 보화인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머뭇거릴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은 모든 범죄를 용서해 주셨고 지금도 말씀의 음성으로 권면하시지만 세상 재물 때문에 귀가 둔하여지고 눈이 열리지 않아 주를 따르지 못하고 영생을 놓쳐 버리는 제2, 제3의 관원들이 없다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주가 인도하는 길을 알고 가야 할 곳을 알았다면 어떤 괴로움이 가로막는다 해도 나의 환경에 감사하며, 열심히 제자의 길을 걷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 기록된 모든 계명은 신약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이요 순종해야 할 법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마지막 종들을 위하여 관원에게 말씀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약시대의 율법을 아무리 완벽하게 지켰다 할지라도 예수가 오신 후부터는 그분과의 관계를 다시 맺고 그 피의 은총을 입고 하늘의 보화를 소유한 자가 되어야만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교훈을 계속 받고 진실하게 살았다고 해도 예수의 피의 은총이 없으면 그는 영생을 놓치게 되고 약속의 땅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의 종은 물질에 끌려다니는 노예가 되지 말고 물질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하늘의 보화인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가 있다. 이제 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참이웃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였기에 내 주위에 죽어가는 세상 이웃(γείτων 게이톤)을 살리는 일에도 앞장 서서 훗날에 주 앞에 설 때에는 칭찬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가나 혼인 잔치의 물로 된 포도주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婚姻)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宴會場)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表跡)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1-11).

릴리 서쪽 조그마한 가나라고 하는 동네에서 혼인 잔치가 베풀어졌다. 이스라엘의 잔치는 보통 가을 추수를 한 뒤 1주일에서 2주일씩 하게 되는데 잔치날은 마을 전체가 한바탕 축제(祝祭) 기간이 된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신 지 3일째 되던 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에 예수의 모친도 와 있었다. 그런데 이 잔치 집에는 생각보다 많은 손님이 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넉넉하게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축하객들로 흥겨워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갈 때 포도주가 떨어져서 낭패를 당하게 되었다. 이렇게 중요한 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라 즐거운 잔치 분위기가 깨어져서 하객들의 빈축(嚬蹙)을 사게 된다면 혼주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건을 목격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긴급히 예수께 와서 포도주가 떨어지게 된 사건을 말하고 또 일하는 하인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보면 마리아는 손님으로 온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잔치집 어느 한 쪽이 마리아의 집안과 관계있는 것 같다.
이 때 예수께서 어머니의 권유를 받아들여 하인들에게 물을 돌항아리에 갖다 붓게 하고 그 물을 연회장(宴會長)에게 갖다 주게 했다. 이것은 예수께서 공생애 초기에 행하신 첫 번째 표적(表跡)이었다. 마태는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熱病)을 치유한 사건(마 8:14-15)을 첫 이적으로 기록하였고 마가와 누가는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사건(막 1:21-28, 눅 4:31-37)을 첫 이적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들은 첫 번째 이적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았다. 요한만이 복음 사역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처음 행하신 표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주님이 베푸신 많은 이적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이적들이 많은데 한 개인의 잔치집에서 일어난 일을 첫 이적이라고까지 하며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면에 숨겨진 큰 비밀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1. 먼저 나온 포도주

수많은 인간 대사 중에 가장 기쁘고 아름다운 것이 혼인 잔치이다(마 22:1-10). 즐거운 잔치에는 항상 포도주가 끊어지지 않도록 연회장(宴會長)이 책임을 지고 신경을 써야 한다.
혼주는 축하객들이 포도주를 풍족하게 마시고 즐겁도록 계속 살피면서 신경을 써서 준비해야 한다. 만약 손님은 많이 모였는데 포도주가 도중에 떨어질 때에는 즐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경직(硬直)되고 소란해질 것이다.
유대인의 속담(俗談)에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도 없다”라고 한 것을 보면 잔치집에는 중요한 것이 포도주인 것 같다. 포도주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상징으로 등장한다(전 10:19). 그리고 신약시대 때는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상징하며(마 26:27-28) 진리를 뜻하기도 한다(사 25:6, 55:1).
요한복음에 나오는 잔치집 포도주 사건은 성도들의 진리의 말씀 잔치의 비유로 볼 수 있다. 이 잔치는 하나님의 집으로 천국 백성들이 초대되어 즐거움과 충만한 은혜 속에 아름다운 교제(交際)가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먼저 나온 포도주 역사는 은혜시대의 십자가 피로 얻게 되는 구원의 잔치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는 것을 말하며 점점 은혜시대의 포도주가 메말라 가고 있을 때 나중 나오는 능력의 포도주는 몸의 구속을 얻게 되는 신원의 날의 말씀 포도주 잔치이다. 은혜시대에 예수를 믿고 구원의 포도주 잔치에 초대된 자들이 먼저 나온 진리의 포도주를 먹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 포도주를 먹으면 기쁨을 맛보게 될 뿐 아니라 내세를 바라보게 되고 천당에 가게 되는 것에 감사하게 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만족하게 된다.
포도주에 크게 취하였을 때는 소망에 넘치는 기쁨과 감사가 나왔고, 이러한 잔치는 삶의 목적도 바꾸어 놓았다. 진리의 포도주에 취한 자들은 금식과 철야기도의 불을 붙였고 그 뜨거운 열기는 입을 열어 예수를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하였고 사탄의 어떤 방해하는 세력도 이 역사를 가로막지 못했다. 포도주의 위력으로 굶주림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생명까지도 돌아보지 않고 주를 위해 아낌없이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 많은 성도가 모였으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진리의 포도주는 점점 말라 고갈되어 가고 있으며 갈급한 영혼들의 몸부림은 늘어만 가고 있다.
오늘도 은혜시대의 잔치는 계속되지만 포도주가 떨어져 가기 때문에 새로운 포도주를 서둘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운 이 시기에 먼저 나온 포도주는 떨어져 가고 갈증으로 많은 청년 남녀들이 동에서 서로 말씀을 찾아 헤멜 때가 온다고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였다(암 8:11).
모든 교회들이 십자가 아래서 포도주 잔치를 하고 있으나 포도주 맛이 점점 변질(變質)되어 가고 있으며 그나마도 부족해지고 메말라가고 있다.
외치는 자는 많건마는 참생수의 말씀은 고갈되어 은혜가 떨어져 가니 종들은 당황하고 양들의 신앙은 점점 퇴보되어 가고 있다. 양들은 교회를 찾아왔으나 만족한 양식을 먹지 못하므로 교회는 분쟁과 시비가 생기며 때로는 서로 비방과 원성(怨聲) 속에서 신앙이 병들어 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양들은 새로운 포도주를 마시기를 원하며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 돌항아리에서 떠온 물이 포도주가 되었듯이 이 시대의 연회장은 생수의 포도주를 새롭게 내놓아야 하며, 잔치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보다 더 좋은 포도주를 끊임없이 내어 오도록 하여야 한다. 그런데도 연회장은 아직 물로 된 포도주가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

2. 나중 나온 포도주

먼저 나온 포도주와 나중 나온 포도주 때문에 가나 혼인 잔치는 가장 즐거운 잔치가 되었고 물로 된 포도주의 참맛은 끝까지 참여한 자들만이 마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잔치에 되어진 상황은 앞으로 시대적인 진리 역사가 나타날 것을 설명하신 것이다.
많은 손님이 잔치에 초대되었으나 대접할 포도주가 모자랄 때 황당한 일을 당할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셨다. 먼저 하인들에게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였다. 그 다음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갔다 주었을 때 이 날까지 맛보지 못한 최고의 포도주가 되었다.
연회장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신랑을 불러 말하되 일반적으로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이번 잔치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가 나중에 내어 놓았다면서 놀라워한다. 그러나 불평없이 순종하여 물 떠온 하인들은 그 비밀을 알고 있었다.
나중 나온 더 좋은 포도주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시요 전능자(全能者)이시기에 이적과 표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뜻을 찾아내야 한다. 먼저 나온 포도주가 떨어지고 잔치가 끝나갈 시기는 이 세상 마지막에 진리가 고갈(枯渴)될 것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죽어 천당 가는 포도주 잔치가 2000년 동안 베풀어졌기 때문에 성도들은 현재에 있는 포도주만으로도 만족해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풍성했던 포도주가 교회마다 말라가고 있다. 이제 성도들은 천당 가는 포도주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것을 찾고 갈급해하고 있다. 그 중에 더러는 영혼의 양식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사탄의 덫에 걸리기도 하고, 연약한 양들은 영생의 물을 흡족하게 마시지 못하고 기진한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 중에 어떤 성도는 오염된 물을 먹고 몸부림치다 쓰러져 생명을 잃기도 한다.
잔치가 끝날 즈음에 포도주가 떨어져 간다는 것은 시대의 전환기가 온다는 것이다. 강단에서는 풍성한 은혜가 내리는 것 같지만 영혼의 갈증이 더욱 심해지는 것은 은혜시대 말기적 현상이다. 한 잔치집에 포도주가 끝날 때 또 다른 포도주가 나왔다는 것은 두 시대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비유이다. 기독교 역사는 죽어 천당 가는 진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 좋은 진리로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말씀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잔치에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는 자는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술맛 때문에 더욱 기쁘고 즐겁게 참여할 수가 있다. 새롭고 값진 영생의 술을 2차 역사에 참여하여 또다시 마시게 된 자들은 재림의 아침을 기다릴 수 있는 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나 혼인 잔치에 준비된 포도주만으로 충분할 줄 알았으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져 문제가 발생한 것은 은혜시대가 끝날 무렵임을 나타낸 말씀이다.
은혜시대 말기에 와서 많은 교회들이 진리의 포도주가 점점 고갈되어 가고 있는 현실은 양들에게는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 시대가 가고 또 다른 시대가 올 때에는 새로운 포도주가 나와 즐거운 잔치가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죽어 천당 가는 진리의 포도주로 만족하였으나 이 포도주가 끝날 무렵에는 말씀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므로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신 말씀이다. 그런데 먼저 술을 마시고 돌아간 자들은 나중에 나온 술맛을 알지 못하였거니와 그 술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마지막 2차에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술과 죽어 천당 가는 포도주는 같은 술이라고 하지만 나중 나온 술을 먹은 자의 축복은 서로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이사야 25장 6절에서 8절을 보면 오래 저장된 맑은 포도주라고 하였고, 이 포도주 잔치에 참여하면 면박과 휘장이 제하여지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게 된다고 하였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속받은 자들이 오래 저장된 말씀의 포도주를 마시고 영생하는 즐거움 때문에 만족해하고 기뻐하게 될 것을 가나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하여 보여주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십자가 피와 영혼 구원을 외쳤던 은혜시대가 끝나가고 추수하는 신원의 또 다른 날이 임박(臨迫)한 것을 알고 만반의 준비가 있어야 지혜로운 자라 할 수 있다.
마태복음 25장 5절에서 8절을 보면 미련한 처녀는 간단하게 준비한 등불만으로도 충분할 줄 알았으나 지혜로운 처녀는 만약을 위하여 예비한 기름과 등(燈)을 준비해 가지고 기다렸다. 그런데 생각밖에 신랑이 더디 오므로 기름이 없어 등불이 꺼져 가게 되어 큰 불행을 당하게 되었으나 늦은 시간까지를 생각하고 기름을 준비한 자는 신랑을 맞이할 수 있는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일어난 포도주 비유나 신랑을 기다리는 10처녀가 기름을 준비한 비유는 표현(表現)만 다를 뿐 나타내고자 하는 기본 뜻은 같다. 나중 나온 술과 또 나중을 위하여 예비한 기름은 마지막 두 시대를 암시해 놓은 내용의 말씀인 것을 깨닫고 은혜시대 이후까지 내다보면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한 시대의 역사는 다 지나가고 또 다른 시대가 임박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빼내신 종들에게는 미리 준비하게 하여 역사를 나타내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지금까지 은혜시대에 나타난 포도주가 십자가 피로 복음의 씨를 뿌리는 일에 필요했다면 주님 오실 때에 준비해야 될 포도주는 신원의 날에 추수하는 말씀의 포도주이다. 물로 만든 새 포도주 역사는 환난 날에 나타나는 능력의 말씀으로서 이 술이 마지막 때 나와야 주님 오실 때까지 즐거운 잔치가 계속 진행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 연회장이 되는 주의 종은 나중까지 계속 나올 말씀의 포도주를 미리 신경쓰고 준비하지 않으면 성도들이 왔다가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2차에 나온 포도주가 잔치를 빛나게 한 것 같이 주의 종은 때를 따라 양식을 준비하여 신원의 날에 궁핍함이 없도록 해야 그 종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마 24:45).

1) 물로 된 포도주

잔치는 끝이 나지 않았고 더 필요한 포도주는 나올 것이 없을 때에 예수께서 능력의 물술을 가지고 잔치를 계속 빛나게 하셨다. 예수께서 연회장에게 보낸 술은 포도주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포도주라고 하지 않았으나 연회장만이 맛보고 좋은 포도주라고 했다.
두 번째 나온 술은 포도가 한 송이도 들어가지 않았고 포도주를 담았던 그릇에서 나온 술도 아니다. 다만 빈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주었던 것이다.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의 생수라는 것을 나타내면서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생수와 같은 말씀의 물을 마셔야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하였다(요 7:37-38). 혼인 잔치집에서 1차로 베풀어진 포도주는 가죽 부대에 담겨진 일반 포도주였으나, 2차로 나온 술은 돌항아리에서 나오는 물로 된 술이었다.

2) 돌항아리에 담긴 물의 변화

예수님이 잔치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 이미 포도주는 메말라가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잔치집에는 큰 일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예수님께서 잔치집 손님으로 왔다가 잔치에 참석한 많은 축하객을 위하여 새로운 술인 수주(水酒)를 내놓게 된 것이 돌항아리 사건이다.
유대인의 결례(潔禮)에 따르면 맨 먼저 문 앞에 손을 씻을 물을 통에 담아 놓고 누구든지 그 집으로 들어오는 자는 손을 씻도록 했다.
“결례”라는 말은 “카다리스몬(καθαρισμός)”이라고 하는데 ‘깨끗(정결)케 하다’는 뜻이다. 유대인은 식사 전후나 귀가(歸家)할 때는 꼭 손을 씻는 풍습이 있었다. 잔치집 역시 마찬가지다. 예수께서는 그 돌항아리를 가지고 용도를 바꾸어 술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모세는 돌에서 물을 내었으나 예수는 돌항아리에서 물로 된 최고의 술이 나오게 했다. 모세가 준 물은 마셔도 죽었지만 예수 자신에게서 나오는 물은 영원히 죽지 않는 진리의 생수인 것이다. 먼저 나온 포도주와 그 다음에 나오는 물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로 된 포도주를 가지고 잔치를 한층 즐겁게 만든 역사는 기독교 2차 역사의 즐거움이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진리 속에 한 번도 포도주를 담아 본 적이 없는 돌항아리가 예수님 때문에 술 담는 그릇이 되었다.
원래는 돌그릇에는 술을 담는 법이 없다. 예수님만이 하시는 일이었다. 일반 가정에서는 물통이 한두 개만 있어도 충분한데 이 잔치집에는 두세 통 드는 큰 돌항아리가 6개나 있었다.
큰 돌항아리를 많이 준비한 것은 잔치 때에는 손님을 위하여 많은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돌항아리는 나중 나온 물로 된 포도주의 역사를 위하여 미리 예비한 그릇이 되었다.
1통은 보통 38리터에서 40리터라고 한다(40리터×3통×6개=720리터). 돌항아리 6개에 720리터나 되는 많은 물을 넣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항아리 6개에 아구까지 채워놓았다면 술은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하루에 한 항아리씩 쓰게 되면 여섯 통은 6일을 사용할 수 있다.
가죽 부대에서 내어온 일반 포도주는 떨어져도 예수께서 능력으로 만드신 돌항아리의 물술은 떨어지지 않고 그 잔치 마지막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 잔치는 주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더없이 기쁘고 즐거울 것이다.
6천 년 마지막 때는 주님이 만든 최고로 좋은 술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물로 된 신령한 포도주를 마시는 자는 천 년 안식의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6천 년 동안 이 땅에서 포도주를 마시게 하시던 주님께서 7천 년이 올 때에는 천 년 안식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이 땅의 포도주 잔치는 끝이 나고 새로운 나라에서 새 것으로 주와 함께 나누게 될 것이다(마 26:29). 아담 이후 6천 년 역사 속에 자신을 나타내시던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의 말씀을 성취하시어 주님의 나라가 이제 이루어질 때가 된 것이다.
3) 이제는 물로 된 술을 먹을 때이다

성경은 언제나 죽어 천당 가는 역사보다도 주님 오실 때까지 살아 있는 자가 더 복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 비밀은 다 알고 공개된 포도주이지만 진리의 물로 된 술은 아직 공개되지 아니한 말씀의 술이다. 이 술은 늦게 나와서 살아서 구름 타고 주님 맞이할 자들에게 마시우게 하는 능력의 포도주인 것이다. 이 물술을 먹게 되면 죽을 몸도 죽지 않고 썩을 몸도 썩지 않고 영생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연회장이 맛보고 놀랐던 이 물술을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이 다 마시도록 내어 놓아야 한다.
죽어 천당 가는 포도주도 좋았거든 하물며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는 나중에 나오는 더 좋은 술을 마시면 얼마나 놀랄 것인가?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 최고의 술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날까지 연회를 베풀어도 이것은 처음 맛본 술이기 때문에 놀라움에 휩싸여 크게 외쳤다는 것이다. 은혜시대에 마시지 못한 물술을 이제 모두가 맛보고 몸의 구속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온 세계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술(水酒)을 다 마실 수 있도록 우리는 준비해야 하며 또 어디든지 공급할 수 있는 심부름꾼이 되어야 한다. 살아서 주님 맞이하는 진리의 술, 권능의 술을 항상 준비해 놓고 마시는 자마다 즐거운 노래가 나오게 해야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술을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라고 하였다. 또 이 포도주 잔치에 참여한 자는 사망을 먹어 치운다고 했다(사 25:6-8).
혼인 잔치에서 물로 만든 술을 연회장에게 보낸 다음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부패된 종교 지도자들의 상을 엎어버리고 짐승들을 몰아내면서 하나님의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하셨다.
이 시대에 새로운 포도주 잔치를 열지 못하면 교회는 점점 빛을 잃게 되고 장사하는 장소로 바뀌게 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진리의 술을 준비하여 놓고 초대하여야 한다. 이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영과 육까지 살아서, 이 세상이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실 때에(계 11:15) 그와 더불어 그 나라에서 왕 노릇할 자들이다(계 20:4).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므로 이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이 축복의 반열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서로 상충되는 난제들

성경 말씀 속에는 내용이 서로 상충(相衝)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영생과 구원 문제가 신앙생활에 많은 혼선을 가져오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을 신학자들은 해석이 곤란한 난해(難解) 구절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덮어 놓았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신랑이신 주님께서 신부 되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에 깨달을 수 없도록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정한 때가 올 때까지 그 비밀이 감춰져 있을 뿐이다.
기독교는 구원과 영생의 종교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그 방법과 찾는 길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성경에서 정확하게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숨겨진 영생의 비밀은 십자가의 피의 능력에서 시작되고 있는데 영혼 구원과 몸의 구속까지 성경 말씀에서 깨닫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내세에 대해서 관심은 많으나,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영혼 구원 외에 다른 답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배우고 영육 구원의 방법도 깨닫게 되어야 자신 있게 증거할 수가 있고 구원과 영생에 혼선을 막을 수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영혼 구원과 영육 구원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성경 안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구원관에 확신을 갖지 못하면 신앙을 계속 유지할 수가 없다. 영생에 대한 믿음의 뿌리가 약하게 되면 조그마한 시험이 와도 쉽게 넘어지거나 무속신앙으로 빠지기가 쉽다. 이 시대의 성도들은 세상 지식과 삶의 경험은 많으나 내세에 이루어지는 영적 지식은 너무나 미미(微微)한 상태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정확한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가 많이 있다. 특히 젊은 층에서는 천국에 대한 소망과 구원의 확신이 점점 사라져 가고 영생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미혹하는 사탄의 세력들이 많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므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구원이 흔들리고 있다. 빗나가는 구원과 영생 때문에 기독교인의 근본 신앙사상이 허물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구원 문제만은 확실하게 정립(挺立)되어 있어야 미혹을 물리칠 수 있고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

1. 두 종류의 구원 문제

문제 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문제 2.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마 7:21).
경 말씀 가운데 구원의 뜻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위의 말씀을 읽어보면 구원 문제에 혼란이 생기게 된다. 또 여러 학자들이 해석을 해 놓은 것을 읽어보면 만족한 대답이 없고 오히려 더 복잡한 의문과 혼선만 생기게 된다. 로마서 10장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고, 마태복음 7장에서는 내 아버지의 뜻대로 실천하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했다. 이 상반(相反)된 내용을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시대의 구분도 나누지 않고 십자가 믿음 안에서 영혼 구원만 다루다 보면 두 구절의 기본 뜻이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구절이라도 문맥을 살펴보면서 먼저 두 시대를 나누어 놓으면 구원 문제도 쉽게 정리될 수 있다. 그 다음에 구원의 종류를 분리하여 해석하면 혼선이 없고 근본 뜻을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고 큰 은혜가 될 것이다. 1) 믿음으로 얻는 구원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영생을 얻는 과정이 독생자 예수를 믿음으로만이 얻어지는 구원인데 아무 조건이 없다. 또 로마서 10장 10절에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是認)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였고, 13절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 어떠한 자라도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그 순간에 영혼 구원을 얻게 된다. 여기는 민족이나 성별도 관계없다. 주님의 십자가 피를 믿고 시인하고 고백할 때에 하나님의 친자녀가 되며 구원의 선물을 얻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이 죄인에게 나타나게 되므로 즉시에 이루어지는 구원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한 말씀 그대로 예수를 믿기만 하면 성경 말씀 속에 있는 내용이나 뜻을 몰라도 아무 조건없이 구원이 성립된다. 이렇게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내 공로가 0.0001%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죄인을 살려주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 즉시 구원의 선물을 얻게 된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한 것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긍휼과 사랑을 알 수 있다(마 1:21). 이방인은 하나님도 모르고 금수(禽獸)와 같이 살아가는 자들인데 십자가 피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주님께서 온전한 사랑을 아무 대가없이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이 구원을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하였으나(마 11:19), 예수께 찾아온 수많은 죄인들은 사죄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 이사야 2장 3절에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오게 되며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예언한 그대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구원의 말씀이 시작되었고(행 2:1-4), 또 누가복음 24장 47절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역사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신 그대로 이루어졌다.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께서 자신의 피를 통하여 한 시대를 여실 때 새로운 예배가 시작되었고 그 예배는 십자가 부활이 중심이 되었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피로 구원이 열리는 시대를 은혜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는 예수의 피 하나만 있으면 어떤 행위 조건이나 이유도 따지지 않는다. 이렇게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모든 죄를 덮어 주시기 때문에 은혜시대라고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이사야 42장 1절에 보면 이 땅에 오시는 예수는 이방(異邦)에 공의(公義)를 베풀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말씀 그대로 본방(本邦)은 예수를 배척하였고 이방은 환영하였다. 로마서 4장 3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으니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했다(롬 4:2). 이 말씀은 얼마나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확신을 주는 말씀인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분명히 내 공로가 전혀 들어갈 수 없고 행위 조건과도 관계없는 구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구원 문제를 보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을 때에 이 구원은 무슨 구원인가? 참으로 이해하기가 곤란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 상충되는 영생의 갈등 마태복음 7장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한 말씀을 볼 때 먼저 예수의 피로 얻어졌던 구원 문제에 혼선(混線)이 오게 되고 확신을 잃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13절에는 분명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는데, 또 다른 곳에는 아버지 뜻대로 행하여야 한다는 행위를 요구하고 있으니 구원의 확신을 가지다가도 아직 구원의 성립이 덜 된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구절의 영생은 믿음만으로 확신을 얻게 하였고, 또 다른 구절에는 반드시 믿음과 행함이 수반(隨伴)되어야 영생이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영생이 수시로 변하고 상황에 따라 바뀌게 되니 이 영생을 어떻게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구원의 방향이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한 것이 잘못되지나 않았는지 의심을 갖게 된다. 로마서 4장 2절과 3절에는 아브라함이 행위로써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말씀이 있는데, 야고보서 2장 21절에는 똑같은 성경을 인용(引用)하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고 그 믿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주 앞에 설 수도 없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주관해 주시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고 또 입으로 고백할 때에 구원을 얻게 되고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렇게 상반(相反)된 구절을 풀어야 할 때 어떤 묘안(妙案)이라도 있는가?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갈 자격에서 그 행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헌금을 잘하고 열심히 전도하면서 새벽예배나 봉사를 잘하는 정도를 행함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만약 신앙생활을 하다가 잠시 시험이 들어 헌신과 봉사를 하지 못할 때에 주님이 오시면 천국에 못 들어가게 되는 것일까?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히실 때에 한편 강도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 직전에 순간적인 말 한 마디로 구원을 받았다. 그 강도는 구원받을 만한 행위 조건이 없는데 구원을 받고 낙원에 들어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한편 강도는 죽은 믿음을 가지고도 구원받았단 말인가? 이젠 성경으로 정확히 답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문자에 담아 놓았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움이 아니고는 참뜻을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가 없다. 성경에 기록된 구원 문제의 상반된 해답을 찾아 확신을 심어주지 않으면 많은 거짓 선지자들 앞에 성도들은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가 현실적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데 해결할 방법은 무엇이며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답을 제시해 줘야 한다. 처음에는 믿음 하나만으로 모든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시더니 그 다음에는 행위 조건에 구원의 초점을 맞추어 놓았기 때문에 여간 헷갈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도 시대적인 역사에서 깊이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역사와 구원이 얼마나 오묘한지 그 섭리를 깨닫게 되면 신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시대 역사와 두 시대에 나타나는 구원을 먼저 알아야 한다. 3) 행위가 수반되는 구원 지금까지는 은혜시대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구원이 이루어졌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믿음만으로 안 되는 시대로 바뀌게 되는 것을 직감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 말씀을 보면 은혜시대에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한편 강도와 같은 죄인도 십자가 위에서 예수를 찾았을 때에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구원을 얻게 되었다. 일단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은 육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영혼은 낙원에서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오는 신원의 날에는 믿음 안에서 말씀의 법을 지킨 자라야 구원을 얻게 된다. 이 시대에는 믿음뿐 아니라 행위 조건도 진리 안에서 말씀대로 순종해야 영생을 얻고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는 영과 육이 구원을 얻는 축복이기 때문에 흠(欠)과 티가 없이 준비되어야 한다(살전 5:23). 예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하신 것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믿음과 인정받을 만한 말씀의 행위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는 죄와 상관없이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허락한 구원이다(히 9:28 참고. 「두 시대 구원 역사」). 신원의 역사는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고 하는 단서가 붙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자에게 영혼과 육체가 구원을 얻는 은총(恩寵)을 베풀어 주시므로 그 수가 극히 적다고 하였다. 이렇게 두 가지 구원이 세상 끝날에 나누어진다면 자신의 신앙이 어디에 속하여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시대는 이미 은혜시대가 저물어 가고 환난시대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서둘지 않으면 안 된다. 마태복음 7장 21절을 가지고 어떤 학자는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상급에 관한 내용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하면 본문 내용 자체가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하여 말씀한 내용인데 상급은 그 나라에 들어가서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내용은 천국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는 것이 문제가 되어 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은 잘한다고 하지만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이라는 두 시대 역사와 두 시대 구원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신앙생활이 혼란스러워진다. 특히 4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두 시대로 나누어 놓고 구원의 내용과 역사를 분리해야 된다. 은혜시대와 신원의 날의 구원을 나누어 보지 못하면 말씀 자체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난해(難解)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말씀을 두 시대(은혜시대, 신원의 날)로 나누어 놓고 영혼 구원과 영육 구원의 시대로 분리해 보면 정확한 해석이 되므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다. 지금까지는 성경 말씀 속에서 시대 구분을 하지 않아도 신앙 고백에서 얻은 믿음 하나만으로도 구원에 만족했고 영생 문제가 해결되는 시대였다. 그러나 이제 은혜시대 이후에 오는 신원의 날은 말씀시대이기 때문에 정확한 말씀이 없으면 혼선이나 탈선이 될 수 있다. 영육 구원 문제에 신경을 쓰는 자는 말씀의 바른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앞으로는 십자가 피를 믿는 터 위에 말씀의 집을 짓는 자의 길은 순탄한 길이 아니다. 이 길은 너무나 좁고 험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찾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마지막 시대에는 주님의 뜻을 따라 신행일치(信行一致)된 삶을 살면서 신앙의 지조를 지킨 자들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구원과 관계되기 때문에 조그마한 행동에도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말씀으로 무장을 하면서 육체의 소욕을 죽여 결점이 나타나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된다. 말씀을 따라가는 길은 십자가의 고난이 따르는 길이요 외롭고 고독한 길이지만 육체 구원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소망을 잃지 말고 견디어야 한다. 영과 육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렵다고 미리 포기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24장 13절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지 않았는가? 노력한 대가는 반드시 오기 때문에 그 날의 영광을 위하여 뒤돌아보지 말고 끝까지 주어진 일에 열심히 달려가야 한다.

2. 성도의 가정 문제

문제 1.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니라”(딤전 5:8). 문제 2.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
의 두 가정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바른 답을 찾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풀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난해로 남겨 둘 수도 없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두 시대 속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1) 가족 중심의 신앙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하였다. 은혜시대에는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이므로 가정의 중요성을 배제(排除)할 수가 없다. 믿는 성도가 신앙을 중심으로 살되 가정을 등한히 하면 안 된다. 예수를 믿는 가정은 생활의 모범(模範)이 되어야 하고 신앙의 빛이 되어야 불신자들에게 전도가 된다. 만약 믿는 가정에 복잡한 문제가 생기고 시험이 오게 되면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되고 복음 역사에 큰 방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성도의 가정은 신앙뿐 아니라 모든 면에 희생적인 생활로 모범이 되어야 주님께 영광이 될 수 있다. 신앙을 핑계로 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면 복음의 문은 닫히게 되고 진리의 빛이 가리게 되기 때문에 믿는 성도가 가정을 돌아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 먼저 믿은 자는 항상 불신자 앞에서나 신앙이 어린 사람 앞에 부담을 주는 언어, 특히 가시돋힌 말은 금물이다. 믿는 자의 대화는 항상 부드럽고 평안한 모습으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할 때 듣는 상대방이 맘을 열게 된다. 이방인들의 눈에는 먼저 믿는 자들의 모범된 행동을 보기 때문에 잘못하면 실망과 상처를 주게 되므로 말이나 행동에 신경을 쓰고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성도는 모여서 대화를 할 때든지 단체생활을 할 때에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히 여겨 신앙인의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은혜시대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식구들을 돌아보면서 사업이나 직장생활도 열심히 하고 모범된 신앙생활을 해야 된다. 우선 가정에 주님을 모신 자들이기에 그 가정이 평안해야 하고 행복해야 한다. 식구들이 믿음 안에서 진리로 합심하여야 가정 천국이 될 수 있다. 또 믿음의 가정이 되어야 신앙의 유산(遺産)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세워진 가정이 되어야 주위에 있는 이웃에게도 그리스도인의 참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고,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의 교제와 신앙의 격려가 있어야 복음의 빛이 전파될 수 있다. 은혜시대에는 사후(死後)에 영혼 구원과 부활을 목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십자가 안에서 믿기만 하면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신앙 안에서 대인관계가 좋으면 신앙 좋은 성도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참성도는 은혜시대의 신앙만으로 만족하고 멈추어서는 안 된다. 말씀으로 장성한 자가 되어야 환난을 이길 수가 있고 주의 신부가 되어 왕궁 도성에 들어가게 된다. 2) 가정을 포기해야 하는 신앙 마태복음 19장 29절에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하였고, 마가복음 10장 29절과 30절에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라는 단서가 붙어서 이 모든 것을 다 버린 자는 백 배(百倍)나 받게 되고 핍박을 겸하여 받으면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다. 누가복음 18장 29절에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라는 조건을 달아놓고 가정과 자기 식구들뿐 아니라 재산까지 다 포기할 때 여러 배를 받게 되며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관복음에 나타난 공통된 내용을 보면 영생을 얻기 위하여는 땅에서 함께 사는 부모와 처자식과 재산을 반드시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문에 약속한 영생을 과연 누가 쟁취할 수 있겠는가? 이 땅위의 인생들은 본능적으로 누구나 영생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연구와 투자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신 말씀과 행위 조건이 수반되어야 얻는 영생과는 너무나 차이가 난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할 때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으나 육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생명까지 버려야 한다면 어느 방향으로 영생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혼돈이 올 수밖에 없다. 어떤 구절은 가정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불신자보다 더 악한 사람이라고 하여 가정을 돌아보라고 하였고, 또 다른 구절은 가정뿐만 아니라 전토, 재산, 자식, 심지어 아내까지 버려야 내세에 영생을 상속한다고 하였으니 어떻게 해야 시원한 해결책이 나올 수 있을까? 그냥 난제로만 보고 넘겨버려서는 안 될 것이며 인위적(人爲的)으로 해석하면 진리를 위증(僞證)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당면한 영생 문제를 적당히 넘겨서도 안 된다. 이렇게 말씀이 서로 대립된 내용을 바로 설명해 주지 못하면 믿음뿐 아니라 신앙생활에 큰 방해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확실한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실 때에 먼저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였다. 그 다음에는 식구들은 돌아보지 말고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재산까지 과감하게 포기해 버리지 않고는 영생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구원과 영생 문제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니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으며, 누가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있을까? 마태복음 19장 29절의 가족과 전토를 다 버렸을 때에 얻어지는 “영생”이라는 단어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얻게 되는 “영생”이라는 단어는 똑같이 조엔 아이오니온(ζωὴν αἰώνιον), 즉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가족과 모든 것을 다 포기할 때 백 배의 보상과 영생이 상속된다는 내용과 무조건 믿기만 하면 영생이 온다고 하는 것의 차이점은 어떻게 다를까? 또 영생의 조건이 다르면 결과는 또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해답 역시 은혜시대의 역사와 신원의 날에 역사하는 말씀으로 구분해 놓으면 영생 문제는 명확(明確)하게 증명이 될 수 있고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구원이 서로 다르게 설명된 것 역시 두 시대에 나타나는 구원과 영생을 말했기 때문이다. 두 시대(은혜시대와 신원의 날)에 나타나는 역사를 모르면 자신의 구원과 믿음에 혼란이 올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속에 두 시대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바로 알게 될 때에는 오히려 감사가 나오고 자신의 구원관을 확실히 정리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은혜 아래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은혜시대가 지나가면 이 땅에는 환난의 바람이 불게 되고 주님의 나라가 임박(臨迫)한 징조가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시대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주의 종들은 자기 가족을 돌보지 못할 때가 오게 된다. 가정과 모든 생활은 주께 맡겨 버리고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 선지자 앞에 정면으로 대결하여 신앙을 지키는 파수군(把守軍)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또 생명을 걸고 주의 백성을 살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종의 가족은 책임을 지고 지켜 주실 것이다. 앞서 가신 순교자들 역시 진리 때문에 부모 처자 및 전토까지 다 포기하였고 자신도 생명을 버려 순교의 길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들은 1차 부활에 참여하게 되어 주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말씀 따라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순교한 자들과 죽기까지 충성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룬 변화 성도들에게 예수께서 자기 나라를 약속해 주신 것이다. 이 땅에서는 왕궁 도성에서 누릴 왕권 반열과 상급의 영광은 상상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진리를 위하여 싸운 자들의 영생과 믿음만으로 얻은 영생의 결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두 시대에 나타나는 구원과 영생이 서로 상충되어 있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혼란이 온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시대의 구분을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 대립되는 말씀같이 느끼게 되므로 해석할 방법이 없어 난해로만 돌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별로 역사를 나누어 보면 오묘(奧妙)한 영생의 진리가 숨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말씀들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영생 문제만 보면 이해하기 어렵고 깨닫는 것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생각으로 해석한다면 힘들어 보이지만 신랑의 편지를 받아야 할 신부라면 성령의 도움 속에서 다 알 수 있도록 해 주신다. 신원(환난)의 날에 주의 종은 오직 진리만을 위하고 양떼를 살리는 일에 생명을 바칠 때 생명의 면류관과 의의 면류관이 예비된다고 하였다(딤후 4:8, 계 2:10). 그리고 이들에게는 영육이 함께 영생을 상속받게 되고 백 배의 축복을 받는 자가 될 것이다. 또 다니엘은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한 자는 밤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으니(단 12:3) 이 시대의 사명자로서 말씀의 빛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안내하는 일에 심혈(心血)을 기울이는 일을 해야 된다. 마지막 사명에 충성하므로 영과 육이 영생을 상속받는 종들이 되어 밤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는 영광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두 시대 역사와 사명을 깨닫고 준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영과 육을 보호하시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나라에 들어가서 면류관의 보석같이 빛나게 하신다는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3. 일용할 양식 문제

문제 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문제 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1).



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어떤 구절은 이해가 되다가도 정반대되는 구절을 읽게 되면 서로 상충(相衝)되는 말씀 때문에 이해가 되지 못할 때에는 해석에 혼선이 생기게 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였으나, 31절에서는 먹고 마시는 문제나 의복 문제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것들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내용들을 읽을 때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어야 할지 짜증스럽게 되고 당황하게 되지만 말씀 내용을 깊이 음미(吟味)해 보면 깊은 뜻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1) 일용할 양식을 꼭 구해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바로 알지 못하면 마태복음 6장 11절과 31절은 서로 상충되는 말씀이 되고 정반대되는 내용처럼 보일 것이다.
인생들이 이 땅에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먹는 빵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기도 내용 가운데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으로 생각했다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 기록된 양식이라는 단어를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양식”이라는 단어는 “알톤(ἄρτον)”으로 남성명사 단수로 나온다. “떡”을 달라고 하신 말씀 앞에 정관사 “톤(τὸν)”이 그 떡 앞에 있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떡(τὸν ἄρτον)이 된다(마 6:11).
주님께서 맨 먼저 구하라고 하신 떡은 육신의 떡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참떡, 먹고 영생할 수 있는 떡을 구하라는 것이다(참조.「주기도문」중 일용할 양식).
예수 그리스도가 곧 떡이요 진리의 말씀인데(요 6:35,48) 이 생명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를 먹으며 가나안 땅에 들어갔듯이 예수를 믿고 영적 이스라엘이 된 우리도 천국에 가면서 말씀의 만나를 먹어야 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떡을 공급받도록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의 떡을 이 광야에서 얻지 못하면 영혼이 굶주려 살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만족할 수 있는 말씀의 떡을 먹어야만이 그 나라에 살아서 들어갈 수가 있다.
요한복음 6장 48절에서 5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였고 이 떡의 출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신약시대에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천국을 향해 가면서 이 광야에서 그 떡을 항상 구하여 먹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천국 가는 자들에게 하늘의 떡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신 것인데 지금까지는 엉뚱하게도 육적 문제로만 알고 기도를 해왔다. 예수를 믿는 그 날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도 기도할 때마다 매일 매일 필요한 육신의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줄 믿고 하루 동안 살아가야 할 비용까지(교통비, 목욕비) 넣어서 육의 문제를 열심히 간구해 왔다.
육신의 생활 문제만 가지고 날마다 간구한 기도를 생각해 볼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근본 취지와 내용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기도해 온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진다. 우리가 이 광야생활에서 하늘의 만나인 예수 그리스도(말씀)를 날마다 먹어야 그 영혼이 죽지 않고 살아 있게 된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반드시 하늘의 산 떡을 계속 먹어야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날까지 이 양식은 끊어지지 않아야 된다.

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주(衣食住)요, 그 중에서도 빵 문제는 가장 먼저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즉 일어나는 땅의 범죄의 70-80%는 먹고 사는 생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지금까지는 심각한 생활 문제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인 줄로 받아들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기도문을 잘못 해석하면 엉뚱한 뜻이 되어 근본 목적을 크게 벗어나게 된다. 만약 육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면, 31절에 의식주 문제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나 너희 천부(天父)께서는 종들이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對處)해야 할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보면 근본 뜻을 깨달을 수 있다.
주님의 나라가 먼저 이 땅에 임하기를 간절히 구하며 노력하는 자에게는 육신 생활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간섭하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땅위에서 빵에 대한 걱정과 생활의 염려는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종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도와주시고 보호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이다. 하늘의 산 떡을 먹으며 천국을 향하여 달려가는 주의 종들은 자신의 생활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 놓고 주의 나라와 그의 의(진리)를 구하는 일에만 전념(專念)하면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고 약속을 하신 것이다.
구약 아합 왕 시대에 있었던 엘리야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 있는 종의 생명은 하나님이 붙들고 있기 때문에 큰 흉년이 왔으나 까마귀와 사르밧 과부를 예비하여 빵 문제는 책임지고 해결하였다. 이와 같이 마지막 때에도 주의 종은 주기도문에 있는 내용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그 주인은 자기 종의 사생활까지 다 책임을 지신다고 약속을 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임하도록 기도의 제목을 잡고 항상 간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4. 서로 다른 시대에 나타나는 영광

늘의 기독교인들은 재림을 기다리며 내세의 소망과 축복을 사모하고는 있으나 그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축복과 영광은 어떠한지도 모르고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이 땅에 강림하실 때에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몽땅 부활하여 살아 있는 성도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서 공중에서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는 말씀만 믿고 재림을 기다리는 자가 많다(살전 4:16-18). 주님께서 이 땅위에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라면 말씀 안에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알아야 준비를 할 수 있지 막연하게 기다리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1차 부활하는 자가 있고, 백보좌 심판 때 2차 부활하는 자도 있다. 그리고 천년 안식시대를 거쳐서 무궁 안식에 들어갈 자가 있는가 하면 바로 무궁 안식시대로 들어가는 자도 많다. 그러므로 내세를 바라보는 자들은 어디에 목적을 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조차도 모르고 혼란에 빠져 있다. 1) 천년 안식세계에서 얻게 되는 축복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니(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復活)이라”(계 20:4-5).
이 세상이 끝나고 앞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자들의 영광과 상급의 축복은 모두 다르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순교자들의 반열(班列)이 있고, 그 다음에 끝까지 살아서 신앙의 지조(志操)를 지킨 변화 성도의 반열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죽음이 없고 아픈 것이나 괴로운 고통이 없고 슬픈 이별이 없는 나라가 도래할 때에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순교자 외에 일반으로 죽은 자들은 천 년이 차기까지 살아나지 못하고 2차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 이들은 천 년 안식이 끝날 때에는 신(信), 불신(不信) 간에 죽은 모든 자들이 부활하여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자녀들만 영생을 얻게 되고 불신자는 영원한 지옥으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도 1차 부활과 2차 부활로 나누어지고 축복과 영광도 다르게 나누어진다. 또 첫째 부활이 되는 순교자의 영광과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변화 성도의 영광도 차이가 다르다. 고린도전서 15장 40절에서 44절에 보면 “하늘에 속한 형체(形體)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주님 나라에는 모든 상급이 다르고 나타나는 영광도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9장 28절에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寶座)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했다. 이 세상이 새로워지고 주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나라를 다스리실 때에 주의 뒤를 따르던 자들도 보좌에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 중에는 통치하며 다스리는 왕권 반열이 있고 일반 백성으로 섬기는 무리들도 있다. 누가복음 19장 11절에서 19절에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각각 한 므나(μνᾶ)씩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사명을 맡겨주셨다. 종들은 즉시 장사하여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겼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칭찬을 하면서 열 고을과 다섯 고을을 각각 차지하라고 하였는데 이 고을의 통치권자는 주님과 함께 천 년 동안 왕노릇하는 분봉왕(分封王)이 되는 비유인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τάλαντον) 받은 자의 비유도 마찬가지로 주님 재림 때에 누리게 될 영광이다. 주님의 나라에서 얻는 상급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자는 반드시 그 상을 하늘 나라에서 보상해 주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얼마나 어떻게 충성하였느냐에 따라서 각각 받는 상급이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2) 무궁세계에서 얻게 되는 축복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後嗣)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마 22:23-28). 이스라엘 나라의 결혼 풍습에는 맏아들이 결혼하여 자식이 없이 그 남편이 죽게 되면 시동생이 다시 형을 위하여 형수에게 장가들어 후사를 세우는 제도가 있는데 이를 계대결혼(繼代結婚)이라고 한다(신 25:5-6 창세기 38장 1절에서 11절까지 보면 유다 가문에서도 이같은 결혼을 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Σαδδουκαῖοι)들이 예수를 시험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였다(마 22:29-30). ① 무궁시대에는 일반으로 얻어지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 중에 천년 안식시대를 거쳐서 무궁 안식시대에 들어가는 자도 있지만 그 외의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구원을 얻어 무궁시대로 가는 자들이 많다. 본문 내용도 역시 일반 구원을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무궁 안식시대에는 아담 때부터 세상 끝날까지 생명록(生命錄)에 기록된 모든 백성들이 부활하여 들어가는 곳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은 죄악 세상에서 살다가 죽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은총을 입어 구원을 얻는 자들인데 마지막 백보좌 심판 때에 부활하여 무궁 안식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왕권 반열이 아닌 일반 성도로서 천 년 안식 후에 2차 부활로 나오게 되는 자들이다. 2차 부활 때에는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관계없이 일제히 부활하여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며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 심판대 앞에는 2권의 책이 놓여 있는데 하나는 생명책이요 다른 하나는 상벌책(賞罰冊)이다. 생명책은 택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요(불신자는 이름이 없음) 다른 책은 인간들이 이 땅에서 선악 간에 일한 모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된 책인데 생활기록부와 같은 책이다. 이 책에는 상과 벌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상벌책이라고 한다. 만약 이 땅위에서 무슨 죄나 악을 행한 자라도 주 앞에 회개를 했을 경우에는 지워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대 앞에 감추어진 죄가 낱낱이 그 책에서 다 들어나게 되고 상벌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된다. 이 심판으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되든지 아니면 영원히 타는 불못에 들어가게 되는 결정이 나게 된다. 백보좌 심판 때에 생명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궁 안식시대에서 살게 되는데 이곳에는 가족제도가 없기 때문에 아버지나 아들이나 딸의 개념이 없는 나라이다. ② 무궁시대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 마태복음 22장 30절에 부활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은 천사는 영원히 몸이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부활한 몸을 가지고 있는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백보좌 심판 때에 생명의 부활로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육이 죽음으로 영과 나누어졌으나 부활의 영광이 있으므로 죽은 자들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되므로 육체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그러나 천사는 몸을 가져 본 적도 없고 영원히 영의 존재로 역사한다. 주님께서 부활 때에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무궁세계에는 혈통 관계를 논(論)하는 가족제도가 없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그 세계에는 결혼하는 제도도 없고, 자녀를 생산하거나 양육하는 것도 없다. 그리고 죽음이나 이별의 슬픔도, 아픈 것이나 괴로운 눈물도 없는 나라에서 신(神)과 같이 영원히 살게 되는 특성을 말했을 때에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께 하늘로서 온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할 때 주님은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였던 것과 같다(마 12:40). 이 말씀에서 주님은 순종의 길을 걸어가셨고 요나는 불순종의 길을 걸어간 내용 중에 3일 만의 표적만 인용하였다. 요나가 3일 만에 살아나온 사건을 가지고 주님은 3일 만에 부활의 이적이 나타나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3일이란 날 안에서 죽지 않고 살게 된 표적만 해당이 되고 다른 것은 맞지 않는다.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고 하는 말도 이러한 개념에서 이해해야 한다. 주님의 나라에서 부활된 몸이나 또는 변화된 몸이 신과 같이 되어 영원히 사는 모습을 천사의 특성(特性)의 일부와 비교한 것뿐이다. ③ 성도의 모습과 영광은 천사와 비교할 수 없다 첫째, 성(性)이 다르다. 영광을 말하기 전에 하늘에 있는 천사는 남성(男性)이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여성(女性)도 아닌 것 같다. 우리가 확실히는 모르지만 천사는 중성(中性)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람은 부활하여 무궁세계에 들어가도 남자와 여자는 분명히 성(性)의 구분이 있게 된다. 그 나라에 갈 때 부활도 남성은 남성으로 여성은 여성으로 부활한다. 어떤 중성 부활이나 성(性)이 바뀌어 부활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둘째, 면류관을 쓰게 되는 것이 다르다. 영광을 천사와 비교해 보면, 계시록 2장 10절 하반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生命)의 면류관을”, 디모데후서 4장 7절과 8절을 보면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하면서 의(義)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하였다. 주를 위하여 충성한 자에게 상급으로 여러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으며 그 면류관을 종들이 쓰고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천사가 수고했다고 면류관을 쓰게 된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이 없고 또 면류관을 쓴 것도 성경에서 보지 못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살펴보아도 면류관을 쓴 천사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셋째, 통치(統治)관이 다르다. 마태복음 19장 28절에는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했고 누가복음 19장 17절에 “열 고을 권세”와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고 하였는데 천사가 보좌에 앉은 것이나 열 또는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보았는가. 그러므로 부활한 하나님의 자녀와 천사는 너무나 다르다. 천 년 안식에 들어간 성도는 주님과 함께 왕노릇하게 되고 통치하게 되며 영광을 얻게 되지만 천사는 이러한 통치권이나 영광이 없다. 무궁시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넷째, 주거(住居)관이 다르다. 계시록 21장 1절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면서 11절부터 23절까지 보면 왕궁 도성이 나오는데 주의 신부 된 자들은 아름답고 좋은 도성에서 사는 축복을 말했다. 그러나 천사는 왕궁 도성이나 어떤 보석집이 있다고 한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는 유업이 있는데 천사는 유업이 있다는 말도 없다. 다섯째,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천사와 다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피의 공로로 하나님의 친자녀가 되었으므로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고 천년 안식시대나 무궁 안식 세계에 들어가 살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친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창조주 하나님을 영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귀한 역사를 하였지만 천사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어느 구절을 보아도 천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구절이나 약속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있는 사람을 천사도 흠모(欽慕)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내용들을 살보면 하나님의 자녀와 천사와는 다른 것이 너무나 많고 실제로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다. 이제 주님께서 부활의 축복을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고 하신 뜻이 어느 때를 놓고 말씀하신 것이며, 그 설명이 누구에게 해당이 되는지 정확한 답을 알았을 것이다.
천년 안식 축복의 특성 무궁 안식 축복의 특성
  • 피와 말씀으로 이긴 자들과 종의 말씀을 따라 순종한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
  • 백성(종족)은 결혼제도와 가족제도가 있다.
  •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받음(변화 성도 및 순교자(부활 성도)).
  • 만국의 영광과 열 고을 차지하는 권세가 있음. 왕궁 도성의 아름다움이 있음.
  • 천년 안식을 통과하여 무궁시대로 들어감(죽음을 당치 않음).
  • 아담 이후부터 하나님의 예정을 입은 자로서 주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이 부활하여 들어가는 나라.
  • 결혼제도나 가족제도가 없음(시집 장가를 가지 않음). 육체가 있음. 천사와 다름(천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며 천사가 보좌에 앉거나 면류관이나 통치권이 없다).
  • 행함 따라 상급이 있다.
  • 나라 제도가 없음, 육이 있으나 이 땅에서와 같은 통치 제도가 다름.
  • 하나님의 택한 모든 백성(부활, 변화) 함께 영광을 누릴 영원한 나라.
④ 무궁시대는 부활된 몸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본문 내용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께서 무궁시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마 22:30). 무궁 안식시대는 천년 안식시대 이후에 이루어지는 시대이다. 천년 안식시대와 무궁 안식시대의 축복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맨 먼저 아담이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축복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회복하시고 천 년 동안 죽음이 없는 땅에서 아름다운 나라를 세워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시대를 말한다. 그 후에 죽었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두 부활하여 육신이 있는 신령한 영체의 몸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무궁 안식시대가 오게 된다. 이 시대에는 붉은 용과 거짓 선지자와 사망과 음부 이 모든 것들은 불못에 던져 버리고 성도들만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⑤ 시대마다 약속이 다르고 나타나는 역사가 다르다 시대를 바로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영생의 문제뿐 아니라 구원 문제도 서로 상충되어 신앙에 큰 혼돈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모르게 되면 해석하는 이에 따라 여러 대답이 나오게 되고 성도들은 혼란 속에서 확신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천년 안식과 무궁 안식의 시대가 구분이 되고 구원의 종류와 역사를 깨닫게 되면 은혜시대 때의 구원과 환난 날에 얻게 되는 구원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원의 날, 즉 환난 날이 올 때에는 준비 없이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만으로는 불법이 되는 것이다. 반드시 믿음과 행함이 수반(隨伴)되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한 은혜시대의 말씀은 먼저 무궁시대를 목적하였고, 신원의 날의 성도들은 믿고 행함이 있는 말씀으로 천년 안식시대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구분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주님께서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 지금까지 영혼 구원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믿음만을 강조하였다. 이제 이 세상 마지막 때에는 영과 육이 구원을 얻는 날이 오기 때문에 피와 말씀을 가지고 어두움을 밝히고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시대가 오게 된다. 은혜시대는 십자가 중심으로 가정이 하나가 되어 살아야 된다고 하였지만 신원의 날에는 큰 환난이 일어나게 된다. 이 때에는 부모나 처자나 전토를 다 주님께 맡기고 뒤돌아보지 않고 주의 일을 해야 하는 시대가 온다. 성경은 시대마다 역사하는 방법과 종들이 다르게 나타나도록 나누어져 있다. 또 성경 해석이 어려운 것 같지만 시대를 나눠서 보게 되면 성경 말씀이 은혜롭게 풀릴 것이다. 모든 말씀이 시대 구분 없이 한 시대 안에 다 이루어지는 것 같이 기록되었지만 자세히 살보면 한 구절 안에도 여러 시대가 들어 있는 것도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은혜시대와 마지막 신원의 때가 들어 있는 말씀을 몰랐으나 신원의 역사는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시대를 잘 구분하여 보면 하나님의 깊은 뜻과 자기 사명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제 시대를 내다보면서 말씀을 깨닫게 된 종들은 성경을 깊이 살펴보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지금까지 성경을 자세히 본다고 하면서 얼마나 무지하였는지, 빼놓은 말씀도 많고 잘못된 해석을 많이 하였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노아의 방주를 120년 동안 지었다고 선배들에게 듣고 배웠고 또 가르쳐 왔다. 별다른 생각 없이 주일학교 어린 생명들에게까지 배운 그대로 잘못 가르쳤으며 믿게 하였다. 또 많은 학자들의 주석에도 노아 방주는 120년 동안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의심 없이 그대로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성경 어느 구절을 보아도 방주를 120년 동안 지었다고 하는 근거는 발견할 수 없다. 창세기 5장 32절에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고 하였는데 7장 6절과 11절에는 홍수가 땅에 있고 노아가 방주에 들어갔을 때의 나이가 육백 세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세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방주를 짓기 시작했다는 가상을 해도 100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또 방주를 지을 때 세 아들뿐만 아니라 세 며느리들까지 방주 짓는 일을 도왔다고 하면 실제로 방주 짓는 그 기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고 더욱 짧은 날로 단축된다. 왜냐하면 이때 노아의 세 아들은 결혼을 하였으나 방주에 들어 갈 때까지 자식이 없었다. 그리고 방주를 짓는 기간이 120년 동안이나 걸렸다면 세 아들 중에 자녀를 낳은 자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홍수가 끝난 뒤에 그들에게서 자식이 나기 시작했다면 방주 건축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으나 모든 정황(情況)을 종합해 볼 때 방주를 만든 햇수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또한 방주를 만든 나무가 120년이나 되어도 썩지 않게 했다고 하지만 그 중에 썩은 나무를 다시 뜯어내고 갈아 끼우고 했을까?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방주에 대해서 생각해 보거나 확인해 보지도 않고 여러 성도들에게나 어린 자녀들에게 들은 대로 가르쳐 온 거짓 증인의 입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으므로 본이 아니게 거짓 증거를 한 셈이다. 이것은 성경을 깊이 상고하지 아니한 무지의 증거요 큰 실수이다. 그러나 이렇게 잘못 가르치고 배웠어도 십자가 피의 능력으로 구원이 성립된 것은 은혜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조건 없이 은혜로 구원을 얻는 시대에는 비록 잘못 알고 있었어도 십자가 부활만 확실하면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새로 오는 시대는 말씀 그대로 본문에 나타난 대로 정확히 가르쳐야 한다. 잘못하면 자기는 물론 양들까지 죽이는 살인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하신 말씀을 보면 소경 지도자를 따라가는 소경이 둘 다 환난의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고 하였다(마 15:14, 눅 6:39). 내가 말씀을 자세히 보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큰 실수를 범하게 되면 주님은 용서치 않으신다. 주의 종은 이제부터라도 성경을 펴 놓고 자세히 살펴서 두 번 다시 형제에게 실족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성경에 나타난 두 시대 역사와 두 시대 구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된다. 지금부터라도 겸손히 주 앞에 엎드리어 성령의 크신 도움을 받아 모든 난해한 구절들이 잘 이해되기를 바라며 큰 힘을 얻어 주의 뜻을 이루는 종이 되기를 바란다.

기독교인의 두 부류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그 나라에 살아서 들어갈 자와 살아서 들어가지 못할 자로 나누어진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한 자들과 아무 준비 없이 생활하다가 환난에 빠지는 자들로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마지막에는 반드시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질 것을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5).

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기로 예정된 자들은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아무 공로가 없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요 1:12).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 중에는 진리 때문에 순교를 당하여 1차 부활에 참여할 자들과 마지막 백보좌 심판 때에 2차 부활에 일어날 일반 성도로 나누어 놓았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그 나라에 살아서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로 나누어진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한 자들과 아무 준비 없이 생활하다가 환난에 빠지는 자들로 나누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마지막에는 반드시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누어질 것을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공관복음(共觀福音)에 기록된 비유를 보면 두 종류의 길(마 7:13, 마 7:14)과 두 종류의 건축(마 7:24-27), 그리고 두 종류의 물고기(마 13:47)로 나누어지고, 두 사람이 함께 밭에 있어도(마 24:40), 두 여인이 같이 매를 갈아도(마 24:41), 두 남자가 한 침상에 누워 있어도(눅 17:34) 서로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열 처녀 비유를 보아도 똑같은 장소에서 다 함께 기다렸으나 기름을 준비한 자는 신랑을 맞이하였으나 준비 없이 기다린 자는 바깥 어두움에 쫓겨나므로 신랑을 맞이할 수 없다고 하였다(마 25:1-13).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두 종류로 나누어지게 될 때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자와 환난에 쫓겨날 자를 분리하여 말씀하였다. 또 믿는 자 가운데도 말씀에 충성하여 순종한 자를 양으로, 거역하며 불순종한 자를 염소로 나누어 놓고 있다(마 25:33). 이 비유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축복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 오실 때에 왜 이렇게 둘로 나누어지는 말씀을 하셨는지 또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들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좁은 문과 넓은 문

태복음 7장 13-14절에 보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 두 종류의 길이 있고 두 종류의 문이 있음을 말씀하였다.

“멸망(滅亡)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狹窄)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셨다.

믿는 성도들이 주님 나라에 갈 때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이 있는데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있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은 넓은 세상 길을 따라 한평생 살다가 지옥 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넓은 문과 넓은 길을 선택한 자요 믿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을 따라 들어가는 자라고 이해해 오고 또 그렇게 가르쳐 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넓은 길을 간다고 말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길도 없으며 목적지도 없기 때문에 이 말씀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예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불신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니다(요 14:6). 하나님을 믿는 택한 백성 가운데서 두 길을 따라가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고 축복도 둘로 나누어지는 것을 예수께서 여러 비유로 말씀하셨다.

2.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3. 남의 터 위에 건축하면 안 될 때와 건축해야 할 때

4.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

5. 혼인 잔치에 초청된 사람들의 두 부류

6. 열 처녀 비유에서 나타난 두 부류의 성도

7. 유익한 종과 무익한 종

8. 죄인을 찾아오셨던 주님과 의인을 찾아오시는 주님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63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行)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 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 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1 안식일의 기원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새로운 법을 주셨고 그 법에 따라 역사 하셨다 . 아담에게 선악과의 법을 주셨다면 셋에게는 어둠의 자손 과 혼혈(混血)하지 말라는 법을 주셨다 . 노아시대에 와서는 방주 의 법을 주셨고 아브라함에게는 할례(割禮)의 법을 주셔서 그 백 성들을 선민으로 구별하셨다 . 할례받은 백성들이 이방의 객이 되 었다가 고향을 찾아갈 때에도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에서 10가지 법을 제정하여 두 돌판에 새겨 주셨다 . 이 열 가지 계명 중에 넷째 계명은 안식일에 관한 법이다 . 안식 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되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고 하셨 다. 여호와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시며 때가 차매 264이 날을 복되고 거룩한 날로 정하셨다 .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 구약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안식일의 기원과 변천사 (變 遷史)를 신약교회가 바로 알아야 하고, 또 이 안식일을 지키므로 주의 나라에 들어가서 참안식을 누리는 것도 알고, 그 축복이 우 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까지 정확히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 성수(聖守)는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하므로 먼저 이 날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고, 어떤 축복을 받게 되는지도 알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일요일을 참안식일로 지키며 주의 날로 여기고 있으나 안식일 교 회에서는 율법시대에 지켰던 토요일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제7일 안식일교회 ) 그 사람들은 10계 명 가운데 9가지 계명은 신약에 와서 그대로 지키면서 왜 태양신 을 섬기는 일요일을 안식일로 변경하여 지키느냐고 잘못된 주장을 한다. 그들은 시대의 전환기와 안식일의 변천사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일요일을 참안식일로 지키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율법시대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며 양이나 소를 잡았으나 율법시대가 지나 고 은혜시대가 올 때에는 제사 드리는 날도 바뀌고 제사 방법이나 제물까지 바뀌게 된 것이다 . 구약의 안식일이나 제물 자체가 신약시대의 모형인 것을 모르고 계속 날만 고집한다면 양 잡는 제사 방법이나 모든 제도와 절차까 지 옛날 구약시대로 돌아가야 할 것이 아닌가 ? 구약의 법을 따라 양이나 소를 잡아서 제물을 드리는 제도는 폐지하고 토요일의 날 만 가지고 계속 고집한다면 역시 또 변질된 제사가 된다. 만약 하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65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식일을 외면하고 인간들의 생각대로 바꾸 어 버린다든가 편한 대로 정한다면 인본주의 사상으로 결정한 날 이 되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 .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이 성경 속에서 어떻게 변천(變遷)해 왔 는가를 깨닫게 되고 이해한다면 주일예배를 바로 드리는 자들에게 는 큰 은혜가 될 것이다 . 우선 안식일의 개념(槪念)부터 잘 알아 야 하며, 안식일 문제와 나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알고 지키면 감 사가 넘쳐 나오게 된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지 않아도 십자가상의 한편 강도는 구원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지 또 안식일 날이 왜 바뀌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확실히 알아야 오늘의 주일날이 얼마나 귀한 날인지 알게 된다. 안식일 성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면서 반드 시 지켜야 할 법으로 주신 것이요 ,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것이 다(히 3:14-19) . 이 법을 따라가면서 일어난 구약의 역사는 신약시대에 와서 십 자가의 피를 가진 백성들이 천국을 향해 가는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1) 천지 창조의 기념 안식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 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 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 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2-3) . 때가 차매 266창세기에는 안식일의 기원뿐 아니라 우주(宇宙)와 인간 창조와 죄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온 우주와 천 지 만물까지 창조를 마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고 그 중에 복 주기로 약속한 날은 일곱째 날뿐이다 . 다른 날에는 복을 준다는 말씀이나 약속이 없다. 출애굽기 20장 8절에 보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 굽 시킬 때에 시내산에서 계명을 주시며 안식일을 기억하여 반드 시 지킬 것을 10계명 속에 기록하여 주었다 . 천지를 창조하신 이 후에 하나님께서는 처음으로 이 날을 기념하여 쉬도록 명령하셨 다. 이것이 최초의 안식일을 지키는 기원이 된 것이다 .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은 육신의 모든 일을 허락하였으나 일곱째 날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했다. 이 날을 지킬 때 에 자기 가족뿐 아니라 남녀 종과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留)하 는 객(客)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 문(門) 안은 가정집의 문이 아니다 . “솨아르”(r[fi')라는 문 자체 는 성읍, 궁정의 문들을 말하는 것이다 . 이 말은 성문 안에 있는 너희 민족뿐 아니라 타국인이라 할지라도 이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라는 것이다 .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어느 정도로 지켰느냐 하면 지팡이를 가지고 가다가 땅에 흙이 찍혀 뒤집혀졌을 때에는 밭을 가는 죄를 범했다고 했으며 밀이나 보리 이삭에 손을 댔다면 추수 와 탈곡의 죄를 범했다고 회개를 하였으며 안식일에는 모든 출입 도 엄격히 제한하였다 .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특별히 성별한 날로 철두 철미(徹頭徹尾 )하게 지켰다 . 엿새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기간이 니, 인생들도 엿새 동안에 열심히 일을 하고 이레 되는 날은 모든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67일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복을 받는 날이라고 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쉬신 날이기에 하나님의 백성도 함께 쉬도록 한 것이다 . 또 출애굽기 31장 13절에서 17절까지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 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代代)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 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 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 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 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고 했다. 레위기 16장 31절에는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規例)라”고 하였다 . 스스 로 이 안식일에 괴롭게 한다는 것은 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금식하며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 마음을 다하고 너희 몸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다 . 여기 큰 안식일은 창조의 안식일을 말한다 .

이 땅을 창조하시고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 고 주신 은혜에 보답하면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 이와 같이 안식일 성수(聖守) 문제는 이방 백성들에게는 알지도 못하는 날이요 , 상관도 없는 법이다 . 이 법은 고향을 찾는 하나님 의 백성에게만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 법을 감사히 받아 들이고 순종하여 안식을 누리는 복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때가 차매 2682) 출애굽한 구속의 기념 안식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 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命)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 5:15). 신명기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안식일의 개념이 바꿔진 것을 알 수 있다. 신명기 5장 12절에서 15절까지를 보면 천지창조의 기념 안식일이 애굽에서 구속받은 안식일 개념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4백 년 간 노예생활에서 해 방된 것과 구속해 주신 것을 기념하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두 번째 로 허락하신다 .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 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六畜)이나 네 문(r[;v; 솨아르 :성문, 성중) 안에 유하는 객(客)이라도 아무 일도 하 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고 하였다 (신 5:12-14) . 여기까지는 창조의 안식일의 재반복이다 . 그 런데 그 다음 15절부터는 창조의 안식일이 출애굽 구속의 안식일 개념으로 바뀌어진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 되었던 땅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바로 왕을 굴복시키고 이스 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었다는 것이다 . 그 때 양을 잡아 피는 해질 때에 문설주와 인방에 뿌리고 고기는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을 함께 먹고 애굽 땅을 출발하게 하였다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69날을 명(命)하여 구속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였다 . 첫 번째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것은 천지 창조의 기념 안식일이 었다(창 2:2-3) . 두 번째 안식일을 지킬 때에는 창조의 안식일과 관계없이 그대로 지키되 안식일의 개념(槪念)만 바뀌었다 . 이 때 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종 되었던 나라에서 양의 피를 뿌리고 구원 을 얻어 고향으로 가게 된 것을 잊지 않고 기념하여 항상 감사하 는 날로 지키게 된 것이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속의 안식일을 지키게 한 것은 먼 훗날 신약시대에 와서 유월절 어린양 의 구속의 안식일의 예표로 보여 주신 것이다 . 하나님의 아들 예 수 그리스도가 피를 흘림으로 범죄한 인생들이 구속함을 받아 약 속의 땅(천국)으로 가는 과정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거울이 되게 하였다 . 출애굽 이후에 수천 년 동안 양을 잡고 그 피를 뿌리고 안식일 을 지키도록 한 것은 어린양 예수의 피를 영원히 기념하는 안식일 로 바뀔 것을 희미하게나마 출애굽 때 보여준 것이다 . 3) 새 생명을 얻은 구속의 안식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 (逾越節 )이라 인자 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마 26: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으로 유월절을 잡수시게 예비하기를 원하 시나이까 하매”(막 14:12).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 수를 무슨 방책(方策)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 려워함이더라”(눅 22:1-2) . 때가 차매 270처음에는 천지 창조의 안식일을 기념하여 지키게 하신 하나님께 서 두 번째는 애굽 땅에서 해방받아 나온 구속의 안식일을 잊지 말고 지키도록 하셨다 . 이같은 역사는 정한 때가 올 때까지 모형 적인 안식일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

참안식일을 지키게 할 때에는 짐승의 피 대신 하나님의 독생자 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피를 가진 자들에게 사죄의 은총(恩寵)을 입혀주시고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신 날을 기념하며 이 날을 안식일로 지키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다 .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5장 7절에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하였다 .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고생하던 노예 민족의 해방과 광 야생활 속에서 제사 방법과 안식일을 준수하는 모든 과정을 통과 하게 하신 것은 신약시대에 나타날 그림자로 출애굽 때에 미리 보 여주신 것이다 .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라”고 했다. 9절에 “첫 것(율법)을 폐(廢)하심은 둘 째 것(십자가 구속)을 세우려 하심이니라”고 한 것을 보면 더욱 확 실해진다 . 구약시대의 모형적인 안식일은 한 주간의 끝날이 되는 그 주 (週)의 마지막 토요일 날을 안식일로 지켰다 . 천지 창조의 날을 기념한 안식일과 출애굽한 은혜를 기념한 안식일은 모두 토요일에 안식하였다 . 이것은 모두가 모형적인 날이기 때문에 변동이 없으 나 성취되는 신약시대에 와서는 어린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살아 나는 역사가 있기 때문에 날을 바꿀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 하나님 앞에 잡아드린 짐승의 피가 모형이면 제사제도도 모형이 요, 제사를 드리는 안식일이나 이스라엘 민족까지 모형이 되는 것 이다. 구약 백성들이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고 “황소와 염소의 피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71로 제사를 드려도 능히 죄를 없앨 수가 없다”(히 10:4)고 하신 것 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제사만이 사죄의 능력이 있으므로 그 때가 올 때까지 짐승의 피가 제사에 뿌려졌던 것이다 . ⓛ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참안식일이다 죄인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는 구약 유월절 날(금요일 )에 맞추어 죽으셨고 제3일에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새로운 날(일 요일)을 기념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만약 예수께서 유 월절이 아닌 다른 날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일어났다면 구약 의 유월절의 구속과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신약시대에 와서 구약의 유월절에 드렸던 양의 피 대신 예수 그 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구속해 주신 날이 참제사 드리는 안식 일 날이 되고 영원히 기념할 날로 성취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 구 약의 유월절은 양 잡아 피를 뿌리는 법을 지키므로 출애굽의 구속 을 기념하였으나 부활의 역사가 없기 때문에 날의 변동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어린양 예수는 유월절에 죽음으로만 끝 나는 것이 아니다 . 자신의 피를 흘려 죄인을 구속하였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승 리가 있으므로 영생을 소유하게 해 주신 날이 참안식일이 되는 것 이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희생이 된 예수의 피와 부활의 영광은 나에게 직접 관계가 되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날로 영원히 기념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진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랜 후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른 한 날을 예비하셨기 때문에 창조의 안식일의 개념이 출애굽한 구속의 안식일로 미리 바꾸어 그림자로 삼고, 참안식일이 올 때까지 예표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 때가 차매 272구약에 짐승의 피와 안식일 제도는 훗날에 변혁(變革)되는 안식 일이 올 때까지 유한(有限)적으로 지키도록 하신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구약 안식일 제도 때문에 오랜 후에 어린양 예수를 제물로 드리 는 날이 오게 되고, 그 예수는 다시 살아나시게 되므로 부활하신 그 날을 기념하는 것이 참안식일이 될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새로운 안식일이 되고 이 날을 지키는 백성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약속이 우 리 앞에 남아 있다고 하신 것이 오늘의 주일 날인 것이다 . ② 구약 안식일은 신약 안식일의 모형이다 구약 창조의 안식일 개념이 출애굽 때에 양의 피를 뿌리고 구속 받은 것을 기념하는 안식일로 바뀌게 하신 근본 뜻을 알아야 한 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피의 구속으로 이루어질 안 식일을 그림자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 안식일의 피는 모형이었 으나 실제로 성취될 때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피로 구속하였다 . 히브리서 4장 4절에서 7절에 보면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 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 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 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 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하 면서 다른 안식일을 거론하였다 . 그러므로 히브리서 4장 9절에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고 한 것은 신약시대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73히브리서 4장 8절에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 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고 했다. 여호수 아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에 들어간 백성들에게는 여호수아를 통하 여 다른 안식일을 주지 않았고 줄 수도 없었다 . 구약의 모형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며 가나안을 가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어느 한 날을 다시 정하여 지키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 다윗 시대는 물론 아니었다 . 열왕(列王)들의 시 대에 와서도 날을 정하지 못했다 . 안식하는 날은 아무 날이나 정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구속과 관계되는 날을 지켜야 되기 때문이다 . 구약 백성들이 고향으로 가면서 출애굽의 기념 안식일을 지킨 것처럼 신약시대에도 고향 갈 때에 새롭게 정해지는 구속의 안식 일을 지키며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을 예언으로 기록해 주셨다는 것 을 알아야 한다. 신약의 안식일은 창조의 안식일이 아니고 , 율법의 안식일도 아 니다. 주께서 친히 십자가 피의 권세로 승리하신 안식일이요 죽었 던 백성을 구속해 주신 것을 영원히 기념하여 지켜야 할 안식일인 것이다 .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날을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 시 어느 한 날을 정한다고 하였다 . 그 한 날은 사망 권세를 깨뜨 리고 새 생명을 허락하신 날인데 그 날이 바로 안식일 날로 예비 된 것이다 (히 4:7-9) .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때부터 사도들이 중심이 되어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예배를 드리며 구제 도 하고 안식일 날로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마 28:1, 막 16:1, 눅 24:1, 요 20:1). 요한복음 20장 19절을 보면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때가 차매 274모였고 26절에 또 모였다 . 사도행전 20장 7절을 봐도 사도들이 안식 후 첫날에 모여서 떡도 떼고 예배도 드렸다 . 고린도전서 16 장 2절에 보면 매주일 첫날에 고린도교회가 모여 연보를 했다. 계 시록 1장 10절을 봐도 사도 요한이 계시를 받을 때에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계시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이 부활하신 날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신 날이며 죽음에 서 승리한 날이기에 이 날을 안식할 날로 정하여 지키는 것은 너 무나 자명(自明)한 일이 아니겠는가 ? 구약의 모든 피와 제사제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그림 자로 나타낸 것뿐이요 , 온전케 할 수 없는 제사이기 때문에 개혁 할 때까지만 존재할 뿐이다 (히 9:10). 왜냐하면 짐승의 피가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히 10:4).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해결하셨고 개혁된 안식일 예배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여야 한다. 히브리서 7장 12절에 “제사의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라고 했다. 신약시대가 오면 “한 사람도 제단(祭壇) 일을 받들지 아니한 다른 지파(支派)에 속한 자를 가리킨다”고 하 였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 구약시대의 제사가 신약에 와서 그 법과 제도가 바뀌게 되므로 제사(예배)의 날도 바뀌었다 .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레위 지파에서 나왔는데 신약시대의 제사장은 유다 지파에서 예수님이 나왔다 . 한 번도 제사 직분을 맡아보지 않은 유다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와 서 모든 것을 다 바꾸어 버렸고 개혁을 하신 것이다 (히 7:14). ③ 한 주간의 첫날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 구약의 안식일은 매주 마지막 날에 드리게 되고 우리의 안식일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75은 매주 첫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 한 주간 실컷 일을 하고 끝날에 피곤한 몸으로 성전에 와서 드리는 예배와 한 주간의 첫날 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나머지 6일을 내 날로 일하는 것과 어느 것이 하나님께 올바르게 드리는 안식일이 되며, 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예배가 되겠는가 ? 성경적으로 보아도 하나님은 언제 나 첫 것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신다 . 첫 열매, 첫 새끼, 첫 아들, 어느 것이든지 먼저 것을 하나님은 참으로 좋아하신다 . 그렇다면 일주일 중에 어느 날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날이 되겠는가 ? 한 주가 시작되는 첫날에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다 . 그러므로 한 날을 먼저 주께 드린 후 나머지 6일은 육신 의 날로 정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이 성경적인 것이다 . 사업의 수입도 , 농사의 첫 열매도 , 가을 추수 때도 먼저 십일조 를 떼어서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를 가지고 사용할 때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신다 . 그와 같이 날도 처음 시작되는 한 날을 먼저 드린 후에 남은 6일은 우리가 활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으니 열심히 사용해 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생활의 수입은 십일조를 요구하시고 날 은 칠일조를 요구하신다 . 어쨌든 우리 믿는 성도들은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어느 한 날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 토요 일과 일요일 두 날 중에 한 날을 택하게 된다면 어느 날을 선택하 겠는가 ? 죽었던 나를 살려주신 주님을 생각하며 안식일로 지키는 오늘의 주일이 더 은혜가 되고 감사가 될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 신 이 날을 감사하고 즐거워하면서 지킬 때에 주께서는 신령한 복 을 주시고 육의 축복까지도 주시게 된다. 혹자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 태양신을 섬기는 날이라고 비난하 때가 차매 276고 있으나 안식일의 깊은 뜻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만약 내 가 결혼하고 기념하는 그 날이 북한 괴뢰정부의 괴수였던 김일성 생일이라고 꺼려할 이유가 있겠는가 ? 김일성과 내 결혼 기념일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 내 구주 예수께서 나를 대속해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다가 부활 하여 새 생명을 주셨고 하나님의 친자녀가 되게 해 주셨는데 그 날이 이방인들이 태양신을 섬기는 날이면 어떻고 태음신을 섬기는 날이면 어떤가 ? 우리를 살려주신 그 날이 얼마나 감사한 날인가 ? 이 날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이 어떻게 구원을 받 을 수 있으며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었겠는가 ?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자손만대로 기념해야 하고 주님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날을 잊지 말고 늘 감사해야 한 다. 신약의 안식일이 오기 전까지 구약의 안식일뿐만 아니라 모든 제사와 예법들까지 어김없이 율법 안에서 지키도록 하였으나 이것 들은 훗날에 이루어질 예표(豫表)로 하나 하나 보여주셨고 신약시 대에 와서는 이러한 제도를 폐지하셨다 . 이와 같이 새로운 안식일 을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 복 되고 기 쁜 이 날을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반쪽 안식일을 지켜서는 안 된 다. 2 광야에서 실패한 이스라엘 민족이 주는 교훈 율법의 모형적 안식일은 폐하게 되고 십자가 은혜 아래에서 새 로운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도 광야 사건을 돌아보면서 더욱 조심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77해야 한다. 광야생활에서 미혹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의 종을 대적하다가 광야 길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어간 사건 또한 우리들에게 거울이 된다. 복음을 먼저 받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 치 않고 거역하였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

이와 같이 먼 훗날 신약시대가 올 때에도 말씀대로 주님께서 유월절 날에 십 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날을 참안식일로 주었으나 이 날을 잘 지키지 못하면 역시 안식의 축복을 놓치게 된다. 이러한 역사 적 사건을 출애굽 생활 속에 담아서 교훈해 주신 것은 오늘 이 시 대 성도들이 깊이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 광야 길에서 말씀에 순 종하는 것은 자신의 축복이요 ,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새로운 시대가 올 때에 또다시 새 안식일을 주신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마음을 강퍅케 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이 있으므로 안식에 들어 가지 못할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다고 하신 것은 두려운 일이다 . 신약시대에도 구약 때와 같이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주의 종을 대적하고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그 나라를 허락 하지 않겠다는 말씀 앞에 자신을 한 번 돌아보아야 한다. 신약시 대가 도래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참안식일을 지키며 순종한 자 들 중에 살아서 왕권의 유업을 받을 자들도 있고 유업도 없이 부 끄러운 구원만으로 만족해야 할 종족(種族)들도 있다. 그러나 시 험이 들어 모든 것에 불순종하며 불만이 가득하여 대적하다가 환 난에 빠질 자들도 많다는 것이다 . 또 세상 끝날까지 살지 못하고 순교를 당하여 죽었으나 1차 부 활 때에 유업을 받게 될 자들도 있고 2차 부활에 참예하는 일반 때가 차매 278성도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특별히 살아서 유업을 이을 자는 말 씀의 파수꾼이 되어 어둠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그들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전신갑주 (全身甲冑)를 입고 싸우라고 하였다 (엡 6:11). 주님과 함께 못박혔던 한편 강도는 전신갑주를 입지 않아도 구 원받았다 . 하지만 그는 유업이 없는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 성경은 이 부끄러운 구원을 위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 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을 누구든지 인용은 하고 있으나 실제로 해당되는 자는 그 시대에 역 사할 사명자들뿐이라는 말이다 . 모세와 함께 출애굽 역사를 일으켰던 아론은 2차 므리바 사건 때문에 호르산에서 그 옷을 벗길 때에 즉시 죽었다 (민 20:25-29) . 옷을 벗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그것은 사명을 거두 어 간다는 뜻이다 . 하나님께서 맡긴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그 사명이 생명 보다 더 귀한 것이다 . 그러나 그 귀한 사명을 거두어 들일 때에는 그 생명이 허무하게 쓰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라면 그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사명이기 때문에 사명 없는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할 수 없다. 말씀을 가지고 일할 자는 사명에만 생명을 걸고 충성해야 하며 미래의 영광은 주께 맡기고 현재에 충실한 종이 될 때에 천하의 그 어떤 것보다 귀한 자가 된 다. 어려운 광야생활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하므로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밖에 없다. 그 외에는 다 어린 자녀 들이었다 . 마지막 이 시대에도 살아서 가나안 땅인 천국에 입성할 자들은 반드시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사상으로 그 길을 따라가야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79한다. 지금까지는 죽어서 천당 가는 은혜만 생각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해 왔지만 이제는 주님이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갈 때가 가까이 왔 기 때문에 몸의 구속을 사모하면서 순종을 배우고 인내도 연습해 야 하며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훈련도 익혀야 한다. 안식일 문제 와 안식년 축복을 막연(漠然)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출애굽 사 건과 광야에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서 주님께서 부탁하신 말씀 대로 잘 지켜야 한다.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우리 앞에 남아 있어도 놓칠 수가 있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말씀을 깊이 생각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애굽 이후 40년 간 광야생활에서 모세와 여호수아 두 지도자 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사람들의 행동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

모 세 때의 백성들이 원망과 불순종의 세대라면 여호수아 때의 백성 들은 순종과 감사의 세대였다 .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갈 때 모세 시 대의 역사는 1차, 여호수아 시대는 2차 역사로 나누어지는 것을 출애굽 역사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모세의 1차 역사는 피의 역사요 홍해 도하(渡河) 사건과 이적 기사와 만나의 역사였다 . 그리고 여호수아의 역사는 법궤 역사 즉 말씀의 역사로 도강(渡江) 사건 이후 약속의 땅을 정복하며 법궤 를 앞세우는 전쟁의 시대였다 . 이것이 신약에 와서 기독교의 1차 십자가 피의 역사와 , 2차에는 피와 말씀의 역사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히브리서 4장 2절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 이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和合)지 아니함이라”했다. 때가 차매 280“믿음을 화합지 아니함 .” mh;(메) sugkekeramevnou" (슁케케라메누스 ) th'/(테)pivstei (피스테이 ) 아니함이라 화합지 (연합하지 ) (그) 믿음을 위의 단어에 슁케케라메누스 (sugkekeramevnou" )는 “화합(和合) 하다. 연합하다”란 뜻이다 . 즉 모세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화합(연합)하지 못하고 불순종하다가 낭패를 당한 이스 라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이다 . 광야에서 쓰러진 이스라 엘 백성들도 모세를 통하여 말씀을 들었으나 그 말씀이 고향 가는 척도(尺度)가 되는 것도 모르고 그 종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 하나님의 말씀을 귀넘어 들으면서 억지로 따라가기만 하면 가나안 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믿음과 순 종이 연합되지 않으면 이 축복을 놓치게 된다는 것을 광야생활에 서 보여준 것은 신약시대에도 이런 부류(部類)가 나오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좋은 지도자를 보내주고 고향 가는 말씀(율법)을 주었으나 그들은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다가 광야에서 쓰러지게 되므로 예비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 하였다 . 양의 피를 가지고 나온 그들이 가나안을 놓친 것은 순간 적인 실수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천지 창조 때부터 결정해 놓았다 는 것이다 (히 4:3). 하나님의 근본 목적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점을 맞추어 놓았기 때문에 이들이 광야에서 인내하지 못하고 환경을 원망하고 지도자에게 불평하고 시비하다가 다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이러한 실천적 (實踐的 ) 교훈은 훗날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백 성들이 중요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81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참이스라엘이 된 자들은 천국을 바라보며 그 안식에 들어가려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원망과 시비는 금물(禁 物)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붙들지 못하고 베풀어 주신 은 혜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억지로 따라가다가 조그마한 시험도 이 기지 못하고 불평을 하다 보면 그 마음 속에 마귀가 들어와서 농 간(弄奸)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 신명기 29장 4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못 들어 간 것은 광야를 통과할 때에 큰 이적과 기사를 목도(目睹)하고도 보 는 눈, 듣는 귀, 깨닫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지 않았 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세상 것은 잘 보이고 세상 소리는 잘 들렸 으나 영적인 면에서는 소경이요 귀머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가나안 이 보이지 않고 그 말씀이 들리지 않고 마음에 믿어지지 않게 되 었던 것이다 . 시편 95편 10절과 11절의 내용도 믿음과 순종이 없을 때 미혹 을 받게 되고 미혹을 받은 자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 미혹을 받게 된 원인은 마음이 강퍅해져서라고 했다. 오 늘날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마음이 강퍅해지면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놀랄 정도로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 성도가 성도를 미혹 하거나 박해(迫害)하는 것도 가장 가까운 데서, 믿었던 사람 중에 서 일어날 때에 견디기가 어렵다 .

미혹받아 넘어진 자들은 과거에 은혜 받고 도움 받았던 때의 말 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모든 일에 악평과 모함으로 입에 담기조 차 싫은 말을 수없이 쏟아낸다 . 하나님께서 약속한 안식의 땅을 놓치게 되는 자들은 종의 말을 듣기 싫어하고 남에게까지 시험에 들게 하여 함께 넘어지게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마귀는 기회만 있으면 주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을 찾아와서 간교한 미혹의 손길 때가 차매 282을 뻗친다 . 이제 주 5일 근무하고 2일을 쉬는 제도가 보편화되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기란 참 어렵게 된다. 지금도 마귀는 안식일을 온전하 게 지키지 못하게 방해를 하고 있다. 국가의 큰 행사도 주의 날을 선택하고 또 주의 날에 즐거운 오락 프로그램도 더 많다. 텔레비 전 프로도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더 재미 있고 눈길을 끌게 하여 시간을 뺏게 한다. 그래서 주일날 저녁에 좋은 프로가 있으면 신앙이 어린자는 저 녁 예배에 못 가기가 쉽다. 이것도 시간을 빼앗는 미혹이 되는 것 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구약시대를 답습하 지 말고 각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구약의 모든 제도와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과 내용을 다시 함축(含蓄)해 보면 그것은 신약시대를 위하여 모든 것을 진 행시킨 것을 알 수 있다. 그 나라에 들어갈 종들이 미혹받아 넘어 진 일들을 남의 일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 방심하거나 자만하면 마귀는 즉시 그 틈을 이용해서 마음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 그 러므로 모든 일에 신중해야 하며 우리에게 주신 환경을 비관하거 나 원망하지 말고 사명을 위한 준비 과정인 것을 깨닫고 감사하면 서 극히 조심하여야 한다. 3 안식년의 축복과 우리의 자세 1) 안식할 때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이사야 56장 1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83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고 했다. 가까이 온 구원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시대적으로 마지막 때에 나타나게 되는 구원이다 (롬 13:11).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고 했다(사 56:2).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 오염(汚染)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 로 굳게 잡고 살아가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이다 . 안식일을 잘 지키며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언약을 굳게 잡는 자들 에게는 하나님의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 (記念物 )과 이름 을 주며 그 영광이 끊이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 하나님과 연합된 자로서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고 언약 을 굳게 지키는 자마다 생명나무 열매가 있는 나라에 인도하여 기 쁨을 누릴 것을 약속하셨다 . 주님을 맞이할 백성들은 이 안식일을 거룩히 잘 지키다가 참안 식의 땅에 들어가서 영광을 누리는 복을 약속해 주신 것이다 . “그 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 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기록 된 말씀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신약시대에 성도들이 가장 두려워 할 것은 가나안 땅의 안식이 성도들 앞에 남아 있을지라도 들어가 지 못할 자가 있다는 것이다 . fobhqw'men (포베도멘 )ou\n(운)mhvpote (메포테 )kataleipomevne" (카타레이포메네스 )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러므로 혹-함이라 남아 있을지라도 (무서워하라 ) (머물러 있다) ejpaggeliva" (에팡겔리아스 ) eijselqei'n (에이스엘데인 ) eij"(에이스 ) th;n(텐) 약속이 들어갈 에 (그) 때가 차매 284katavpausin (카타파우신 ) aujtou' (아우투 ) dokh'/(도케) ti"(티스) ejx(에크) 안식(휴식) 그의 있을까 자가 중에 uJmw'n (휘몬) uJsterhkevnai (휘스테레케나이 ) 너희 미치지 못할(실패할까 ) 히브리서 4장 1절에 나오는 “우리”는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 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 천국 고향을 찾아 가는 자들은 안식일을 바로 지키고 순종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야 함을 경고하고 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같이 피의 언약을 가지고 약속의 땅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 하고 실패한 전철(前轍)을 밟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 이 시대에도 모든 백성이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받아가지고 살 아가지만 도중에 탈락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게 된다. 주께서 안식 의 날을 약속해 주셨는데 감사히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을 거역하 다가 시험에 빠지면 신앙의 병이 들기 쉽다. 병든 원인을 즉시 돌 아보고 회개한다면 치유가 되지만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원망 하게 되면 마음이 악해지고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고 하 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다가 비참하게 쓰러지게 된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에서 6절까지를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 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 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 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85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미혹받은 다수보다 진실하게 순종하는 소수를 기뻐하신다는 것 이다. 신령(神靈)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음료(飮料)를 마셨을지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나 이방 여자와 간음하는 자들이나 하나님 이 쓰시는 종을 대적하거나 원망하는 자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쓰러뜨렸다 . 이러한 일은 신약시대에도 고향을 향해 출발할 때 에 가장 조심하며 두려워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도록 한 것이다 . 똑같은 환경에서 목적지를 향해 함께 출발했으나 믿고 순 종하여 고향 땅에 들어가는 자와 시험에 빠져 도중에 떨어지는 자 로 나누어지게 하신 것이다 . 과거에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 난 사건들은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고 하였으니 거울은 곧 과 거의 복사판이 되어 현재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 이 사건이 신약시대의 거울이라면 살아서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인데 두려운 일이다 . 우리가 예 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죽지 않고 이 안식에 들어가 느냐 못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호 수아와 갈렙의 신앙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출애굽 사건을 역사의 거울로 보면 불순종하고 대적한 20세 이 상은 다 버린 것과, 20세가 안 된 어린아이들만 여호수아의 인도 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도 예사로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 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마 18:3).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는 거역할 줄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순종을 잘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위선(僞善)이나 거짓이 없다. 오늘날 우 리 역시 진리 앞에 진실하고 어린아이같이 되어야 약속한 안식에 때가 차매 286들어갈 수가 있다. 이 안식은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을 말하는 것이다 . 예수를 믿 고 죽어 천당 가는 자들과 살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축복이 서로 다르다 . 우리의 영과 육은 죽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으나 범죄하고 회개하지 못한 자들은 모두 사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 오실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는 자 중에 말씀을 준비하며 거룩히 성별된 자는 영과 육이 살아서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놓고 영생을 말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 아니다 . 죽을 몸이 죽지 않고 썩을 육체가 썩지 않고 변화를 받게 될 때에 참영생이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들어가는 무궁 안식세계와 변화 성도들이 들어가는 천년 안식세계 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나게 된다.

일단 천년 안식세계를 거쳐서 무궁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믿는 자의 최대 목표이며 영 광스러운 일이다 . 영과 육이 죽지 않고 살아서 들어가는 천국은 분명히 침노하여 빼앗는 자가 들어가게 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비상한 각오와 결심 이 있어야 한다(마 11:12).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천국의 유업을 얻을 자녀에 대하여 계시 록 21장 6절에 보면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 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遺業)으로 얻으리라 나 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하였다 . 천국의 아들 중에 유업이 있는 아들이 있고 유업이 없는 아들이 있다는 것이다 . 이 유업을 얻기 위해서는 이기는 자라야 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으며 이긴다는 것은 어렵고 험난한 길이다 . 믿음 하나만 가지고 걱정없이 편안하게 살면서 목마른 것조차도 모르고 살아가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87는 자들도 있지만 말씀에 목이 말라 갈급해하는 자들도 있다. 이 진리의 물을 찾아 헤메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겠다는 것이다 . 생수의 말씀으로 영적 문제가 해결되고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을 이길 때에 주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게 된다. 이긴 자들은 하나 님의 사랑하는 참아들이 되어 왕궁 도성에서 영광을 누리는 축복 을 받는다고 약속을 하였다 . 여기에는 “믿는 자”라는 말이 없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기본이기 때문에 거론하 지 않았을 뿐이다 .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이미 받은 자들이 그 나 라에 가서 유업을 얻으려면 어떤 환난이나 미혹이 와도 진리의 말 씀으로 이겨야 참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 이 세상에서도 여러 종류의 아들이 있다. 결혼하여 얻은 아들과 외부에서 입양(入養)해 온 아들과 친구의 아들을 데려와 양육을 할 때도 이 아들들이 모두 아버지라고 부른다 . 그러나 참아들은 피와 살을 이어받고 아버지의 호적에 오른 아들이라야 유업이 있 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 앞에는 약속된 유업이 남아 있지만 , 이기는 자가 되어야 기업을 소유할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 2) 날에 대한 시비는 하지 말라 골로새서 2장 16절과 17절에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 (月朔)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 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 니라”고 하였다 . 구약의 모든 절기는 그림자이다 . 예배는 형식적으로 드리면서 날에 대한 싸움이나 안식일에 대한 때가 차매 288것은 서로 폄론하지 말라고 하였다 . 이 모든 날들은 장래의 모형 일 뿐이라는 것이다 . 안식일은 훗날 안식년의 모형임을 잊지 말아 야 한다. 로마서 14장 5절에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고 했 다. 장래 일의 그림자인 날을 가지고 서로 분쟁을 하지 말고 날에 대한 판단을 말라고 했다. 어쨌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는 한 날을 정하여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데 어느 날이 좋겠는가 ? 주말, 주중, 주초 중에서 어느 한 날을 선택해 보라. 어차피 한 날 을 정하여 안식일로 지킨다면 한 주간의 첫 날이 가장 적합할 것 이다. 이 날은 사도 때부터 모였고 기도하며 헌금도 하였다 . 우리가 생각해 보아도 주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 신 그 날을 안식일로 삼고 십자가 은혜를 생각하면서 늘 기념하는 예배가 참 좋을 것이다 . 이 안식일 날은 주의 부활을 기념하며 지 키는 안식일이기에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지켜야 한다. 신 약시대의 성도들은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참안식일로 지킬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무리한 말이 아닐 것이다 . 그리고 이제는 날에 대한 생각보다 이 날을 어떻게 지켜야 참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가 를 깊이 생각해야 하며 나와 안식일의 관계를 잘 설정(設定)해야 한다.

토요일 안식은 실패한 안식일이며 그 안식일을 지키며 가나안을 향해 가던 이스라엘 민족 자체도 실패한 민족이다 . 약속의 땅을 향해 가다가 도중에 므리바 물 사건과 (출 17:1 이후) 먹는 문제로 인해 민수기 11장 5절부터 나오는 사건 등을 가지고 모세와 아론 을 원망하다가 안식의 축복을 놓치게 된 것을 거울로 삼아 신약시 대의 주의 백성된 자들도 이러한 오류(誤謬)를 범하지 말아야 한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89다. 양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은 광야에서 마음이 강퍅하여 불순종하 다가 하나님을 격노케 하여 40년 간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졌 다(민 14:29-34, 히 3:16-18) . 이같은 사건을 바라본 오늘의 우리 도 안식일을 지키며 고향 가는 길이 광야생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문제에 부닥쳐도 방심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주께서 인 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만이 살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광야 길에서 많은 사람들이 원망하고 지도자를 대적했지만 한 번도 원 망 불평 없이 끝까지 참고 기다려 승리한 여호수아와 갈렙도 역시 우리에게 모델로 보여주었다 .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구약의 사건이 모형이라면 신약 시대의 우리들에게도 원망 불평이 반드시 오게 될 텐데 잘 이겨 나가야 한다. 특히 지도자를 원망하며 시비하는 일이나 생활과 환 경의 불평은 대단히 위험(危險)한 일이다 . 모든 여건이 순탄치 못 해도 시험에 걸려드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곤두 세워 자신을 먼저 살피고 기도와 순종으로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함 께하시고 역사하는 시대의 종들과 분쟁하는 것은 스스로 자멸(自 滅)하는 길이 된다. 어차피 이 길을 가야 한다면 앞선 자를 따라 가야지 뒤쳐진 자를 따라 투덜대며 가는 자는 사탄이 노리는 대상 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시험받은 자를 모두 버린 것을 명심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는 것을 배우고 협력하는 훈련도 받아야 한다. 모세를 원망한 고라의 일당이나 (민 16:1-3,30) 다윗을 괴롭힌 사울이나 (삼상 19장-24장)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및 다니엘을 괴롭힌 자의 말로(末路)는 처참하였다 (단 3:29, 6:24). 또 가룟 유다의 말로나 예수님과 제자들을 핍박하고 대적한 율 때가 차매 290법주의자들과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저지른 일에는 너무나 가혹 한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사야 58장 3절부터 보면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하나님 중심으 로 생각하지 않고 인본주의 예배로 전락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응 답하지 않으셨다 . 3) 안식일을 바로 잘 지키자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 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 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 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 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 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悅納)될 날이라 하겠느냐”(사 58:3-5) . 안식일을 지키면서 오락을 즐기고 (인본주의적 행동을 하고) 교회에 서 분열을 일삼고 다투고 싸우는 자들은 안식 세계를 바라볼 수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 열심히 충성한다고 하나 하나님과 무관한 일을 하는 자들이나 거룩한 모양만 드러내고 그 속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없는 자는 참안식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 사람들은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다 . 예수 를 믿고 영혼이 구원을 받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참안식이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갈 자들에게는 편안하고 넓은 길로 간 것이 문제가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91된다. 주님이 오실 때가 되면 더욱 안식일에 대한 중요성이 없어지고 옛날에 가졌던 믿음도 희석이 되어 신앙인의 모습을 나타내지 못 하게 된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 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 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 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고 하였다 (사 58:6-9) .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생명의 양식이 없어 굶주 리는 자에게 말씀의 떡을 공급해 주는 것이며 (요 6:48-51, 7:37-38) ,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가 시험이 들어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세상에서 방황하는 자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 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을 입혀서 주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라는 것이다 (사 61:10). 계시록 3장 17절과 18절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 그러므로 흰 옷을 사서 입고 벌거벗 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한 것은 세상의 옷이 아니다 . 골육 을 피하여 숨는다는 것은 세상의 피부치로 생각하면 안 된다. 예 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백성된 자를 무관심하게 대하지 말 고 돌아보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하였다 . 이러한 때가 차매 292신앙인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환난 날에 실족하지 않도록 앞뒤에 서 지켜주겠다고 하였다 . 이런 종들은 재림의 아침을 볼 수 있는 자들이며 물댄 동산같이 강건케 하시고 진리가 풍성한 초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 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 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 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業)으로 기르리라”고 하였다 (사 58:13-14) . 안식일에 세상 쾌락을 따라가지 아니하며 이 날을 축복된 날로 여기고 여호와 앞에 제일 좋은 날이요 존귀한 날로 여기는 자는 주님이 계신 높은 곳에 올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 한 기업을 누리는 즐거움을 얻게 하겠다는 것이다 . 이 약속은 안 식일과 안식 세계와 밀접한 관계성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주의 날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것을 선택하고 주를 섬기는 자 에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허락한 나라에 들어가서 길이 길이 복을 누리게 하겠다는 것이다 . 그러나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이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못하게 하여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미혹하여 넘어뜨리려 한다. 사탄의 역사가 크게 나타나는 것은 마귀에게는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고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기 때문에 발악을 하기 때문이다 . 안식일을 잘 지키는 자에게 주의 나라를 유업으로 약속한 것을 사 탄이 알고 안식일 예배를 희석(稀釋)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 게 한다. 지금 국가적으로 시행되는 주 5일 근무는 이러한 염려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안식일의 축복과 안식년 축복 293앞으로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될 때 신앙의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게 되면 안식일을 생각하는 마음까지도 도둑을 맞으며 나 자신 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휩쓸려 넘어지게 된다. 예배는 형식적으 로 드리고 세상의 넓은 길을 따라 야외로 놀러 가거나 오락을 즐 기게 되면 신앙의 정로에서 탈선이 되어 영생을 놓치게 된다. 안 식일을 바로 지키지 못하고 등한히 여기는 자는 약속된 가나안 땅 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마귀는 환경을 가지고 넘어지게 하기 때문에 조그마한 시험도 무관심하면 안 된다.

신실한 성도도 예배에 한두 번 빠지다 보면 점점 심령이 마비가 되고 굳어지게 되기 때문에 극히 조심해야 한 다. 이사야 1장 11절에서 15절까지 보면 얼마나 종교가 부패했는 지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 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였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 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다 . 이사야 1장 12절에는 그러면서도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였고 13절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하였다 . 하나 님께서는 받기 싫다는 것이다 . 또 13절 하반절에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 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였다 . 15절에는 아무리 많이 기도해도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듣지 않겠다고 하였다 . 얼마나 종교 부패가 무서운가 ! 오늘의 성도들이 각성해야 할 대 때가 차매 294목이다 . 부패하고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고 인본 주의 예배 모임 자체를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안식일을 귀하게 여기고도 엄숙(嚴肅)하게 예배를 드리지 않아 서 하나님께서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아무개야 !”라고 한다면 얼 마나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겠는가 ? 바쁜 일정 때문에 좇기다 보면 안식일을 그냥 범할 수는 없고 또 맘이 찜찜하여 새벽에 20, 30 분 정도 잠간 다녀간 후에 모든 세상 쾌락을 즐기는 자들이 얼마 나 있겠는가 ? 세상의 파도는 점점 거세지는데 요나같이 깊은 잠에 빠져든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침몰할 수밖에 없다. 이제 교파나 교단의 이념 (理念)의 벽을 넘어 이 시대의 풍랑은 나의 연고라고 엎드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실직으로 실업자의 불안은 가중되고 가정은 좌초(坐礁) 직전에 놓여 있고 자녀들의 교육 질서마저 위험 수위에 놓였다면 무슨 위 로를 어떻게 해야 좋은 처방이 되겠는가 ?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 받는 위로가 가장 좋은 양약이 될 것이며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가장 큰 평안이 될 때에 세상의 일 들도 잘 풀리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넓은 길을 따라가며 방황 하는 길에서 돌아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기쁜 마음으로 드리고 안식일을 잘 지켜 축복을 받아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

1. 안식일의 기원

2. 광야에서 실패한 이스라엘 민족이 주는 교훈

3. 안식년의 축복과 우리의 자세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297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의무인 동시에 축복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십일조를 정해진 규례 (規例)대로 바치면 황충을 금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 중에 십분의 일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이미 하나님의 몫으로 정해 놓은 것을 인간이 임의대로 사용하다가 실족하게 되면 큰 불 행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한 십일조의 약속을 지키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축복을 받게 되지만 만약에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면서 주의 뜻을 거역한다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 도적질 ([b;q' 카바)은 원어로 “훔치다 . 속여 빼앗다 . 약탈하다”라 는 뜻이다 . 주의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면서 하나님의 것을 훔치거나 속여 빼앗는 자는 스스로 저주를 자초(自招)하는 자가 된다. 이 땅의 모든 물질은 십일조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 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이 땅에서 생활하는 동안 언제나 십일 조 문제만은 수입에서 우선 순위에 올려놓아 야 복을 받게 된다. 1 십일조의 기원 십일조의 역사는 아브람 때에 시작되었다 . 기원전 2000년경 소 때가 차매 298돔 땅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이 메소포다미아 원정군에게 재 산을 다 빼앗기고 그의 식구들까지 포로로 잡혀간 일이 있었다 .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자기 군대 318명을 이끌고 추격하여 적 을 섬멸하고 롯의 식구와 재물을 도로 찾고 적의 노획물까지 빼앗 아 돌아왔다 . 아브람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에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영접하면서 그에게 축복을 빌었고 아브람은 전쟁에서 노 획한 재물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다 . 멜기세덱은 살렘 왕인 동시에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였다 (창 14:11-20) . 그 다음에는 야곱이 장자의 축복권을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몰래 받아낸 다음 형의 낯을 피하여 하란 땅으로 황급히 도망가게 되었 다. 가는 도중에 벧엘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어 홀로 돌 베게 하고 누워 자다가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축복의 약속을 받고 그 다음날 아침에 돌기둥을 세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십 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하였다 (창 28:10-22) . 그 때에는 십일조에 대하여 정해진 법이나 자세한 설명은 없었 다. 다만 스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표현으로 자원하여 드렸던 것 이다. 그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역사를 진행하시면서 십일조 문제를 강력하게 법으로 정하였다 . 레위기 27장 30절에 보면 이 땅에 나는 모든 곡식이나 나무에 과실뿐 아니라 짐승까지 도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들은 여호와의 성 물(聖物)이 된다고 하였고 , 그 십일조는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어 관리하게 하였다 (민 18:21). 이러한 십일조는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찾아갈 때에 법으로 세운 계명이지만 신약시대에도 이 법을 계속 적용(適用)하게 한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 ?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299십일조 문제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하여 이제 바 른 대답을 명쾌하게 해 주어야 한다. 2 십일조는 왜 내야 하는가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盜賊)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 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 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 (十一條 )와 헌물(獻物)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詛 呪)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 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糧食)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 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 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 하여 황충(蝗虫)을 금(禁)하여 너희 토지 소산(所産)을 멸(滅)하 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말 3:8-11) . 지금까지 우리는 십일조에 대하여 뚜렷하게 정의(定義)를 내리 지도 못하면서 복 받고 잘 된다고 하니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왔 다. 구원은 예수의 피와 관계를 맺고 축복은 십일조와 관계를 맺 으면 되는 줄로 믿고 지내다 보니 성경 따로 생활 따로 살아온 것 이 사실이다 . 그저 십자가 안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성경 말씀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 하여 구원과 축복을 찾지 못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예물은 별 의미가 없다. 때가 차매 300성경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구절이나 (행 2:21, 롬 10:13),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고 구절을 보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을 얻는 줄 알았는데 , 왜 또 안식일을 꼭 지켜야 하며 온전한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 놓았을까 ? 예수를 믿는 즉시 구원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를 얻는다고 했는데 왜 십일조를 내야 하는가 ? 또 그 십일조는 나 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 금전 문제는 신앙인이 믿음으로 보 지 않으면 종교단체나 기관을 운영하기 위하여 만든 제도로 생각 하기 쉽다.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헌금이나 십일조 문제 를 구원과 축복 문제에 결부시킨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재물은 아주 민감한 문제인데 종교인들에게 법으로 정한 다는 것은 오해받을 수도 있고 거부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는 사 항이다 . 과거 육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갈 때에 세운 법을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구속받은 오늘날의 사람들까지 계속 지켜야만 하는가 ? 지금까지는 안식일 문제나 십일조의 깊은 뜻은 몰라도 예수 십 자가의 피를 믿으면 육은 죽어도 그 영혼은 구원을 얻게 되므로 천당은 확실하게 갈 수 있었다 . 우편 강도는 신앙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 지 않았고 십일조도 내지 않았으며 내는 것 자체도 몰랐던 것 같 은데, 구원을 얻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성도들은 십일조를 어떠한 뜻에서 내고 있으며 구원과 십일조의 관계를 어 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01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십일조는 의무적 (義務的 )으로 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자들도 있고, 또 예수 믿고 십일조를 내면 큰 복을 준다고 하기 때문에 축복에 기대를 걸고 내는 자들도 많 이 있다. 일부 믿음이 없는 자들은 교회에서 내라고 강요를 하니 어쩔 수 없이 내다가 시험에 드는 자들도 많이 있다. 십일조의 중 요성과 헌금에 대한 바른 뜻을 모르고 바치다 보니 여러 가지 부 작용(不作用 )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 과연 십일조를 많이 내면 큰 부자가 되고 십일조를 내지 않을 때는 가난하게 되는 것이 사 실일까 ?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그 목적을 뚜렷이 모르고 내면 액수가 많든 적든 간에 부담이 될 수가 있다. 말씀대로 산다 고 하면서도 바쁜 삶에 좇기다 보면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생각은 하였으나 잊어버릴 때도 있고, 믿음이 약해질 때는 꼭 내야만 하 는가 하는 의심이 생기게 된다. 물질 축복을 위해 주식을 투자하 듯이 막연(漠然)히 교회에 바친다면 실망이 올 수가 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십일조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 이름이나 뜻도 모르고 잘 사는 부자들이 십일조를 잘 내는 부자보 다 더 많이 있다. 십일조를 바치는 문제에 있어서 궁금한 것이 많이 있지만 안 낼 수도 없다. 사실 교회에서 중직(重職)을 맡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게 되고, 내더라도 기쁨이 없고 내지 않으면 찜찜하기 때 문에 할 수 없이 눈치를 보면서 내는 수가 없지 않다. 십일조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면 구체적인 설 명이 필요할 것이다 . 만약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고향(천국)을 향해 갈 때에 지켜 야 할 법이라면 확실하게 알고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말씀의 때가 차매 302뜻도 모르고 순종하는 것보다 근본 뜻을 깨닫게 될 때는 오히려 부담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막 연한 십일조를 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에는 십일조를 내라고 강조한 구절이 없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면 서 “너희가 박하(薄荷)와 회향(茴香)과 근채(芹菜)의 십일조를 드 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 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한 구절이 있다. 주님은 십일조도 내고 의와 인과 신도 버리지 말라고 하시면서 외식(外飾)하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 은혜시대의 큰 사도인 베드로 나 바울도 십일조를 강조하지 않았다 . 십자가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죄를 용서 받고 죽 으면 천당 가는 구원을 전하는 일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십일조 를 크게 논(論)하지 않았다 .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나 연 보에 대해서는 심는 대로 복을 거둔다고 말씀하였다 (고후 9:5-11) .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는 연보하는 것이 복을 심는 것이 라고 했다. 복(헌금)을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며 (고후 9:6), 만약에 심지 않는다면 거두지 못한다는 말 이다.

연보를 “복(eu;logi;a 율로기아 )”이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축복, 찬양’이라는 뜻이다 . 즉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는 자신에게 축복을 심고 나중에는 그 복을 거두는 즐거움으로 감사와 찬양이 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 복을 억지나 인색(吝嗇)함으로 하지 말라고 부 탁까지 하였다 . 우리가 예수를 알기도 전에 그 분은 우리를 아시고 자녀로 선택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03하셨고 , 또 모든 죄까지 담당하시고 대신 죽으셨는데 , 그 은혜는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가 없고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다. 아무 조건없이 구원을 베풀어 주신 주님께서 지금도 하나님 보 좌 우편에서 죄인의 중보자 (中保者 )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 는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뿐 아니라 형편과 사정을 먼저 아 시고 때를 따라 도와주신 축복이 너무 고마워서 주일성수 (主日聖 守)을 하면서 감사 헌금하고 약속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성도의 기본 의무(義務)인 것이다 . 특히 십일조 문제는 환난과 관계가 되어 있고 그 나라에 들어가 는 축복과 연관을 지어 놓았기 때문에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은 약속하신 이 법을 엄격하게 준수(遵守)해야 된다. 하나님의 말씀 을 따라 살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순종을 하다 보면 주님께서 또 은혜를 주시고 이 땅에서도 복을 받게 된다.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면서 기다리는 자들은 필수적 (必須的 ) 으로 내야 하는 것이 십일조이다 . 이 문제에 걸려서 주님을 맞이 하는 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항간에 십일조를 3년 내고 부자가 안 되는 사람이 있는지 보라고 부흥사들이 외쳤지만 십일 조의 참축복은 그런 것이 아니다 . 성경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십일조를 내면 부자가 된다 고 하는 말을 의심없이 믿게 되었을 것이다 . 그렇다면 안 믿는 자 가 잘 살고 큰 부자가 된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마지막 때에 육체가 구원받는 축복 앞에서 십일조를 내는 이유 나 참뜻을 근본적으로 바로 알고 정확히 드려야 한다. 말씀에 따 라 잘 순종하고 믿음이 있어도 십일조 문제에 걸리면 육체 구원은 바랄 수 없다. 때가 차매 3043 황충이란 무엇인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蝗虫)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말 3:11). 십일조를 낸 자에게 황충을 금해 주시고 토지의 소산도 멸하지 않게 하고 포도나무의 열매도 기한 전에 안 떨어지게 해 주시겠다 고 약속을 하였다 . 이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또 황충은 무엇 을 뜻하는 것일까 ? 우리는 지금까지 십일조와 황충의 관계를 단순히 농작물에 피해 를 주는 해충(害蟲)을 막아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 십일조를 잘 내면 황충을 금하여 토지의 소산(所産)을 멸하지 않게 하겠다는 말씀은 농작물에 해충을 금하게 해주는 것으로 지금까지 믿어 왔 다. 그러나 그 뜻은 벌레가 곡식을 안 먹게 해 주겠다는 뜻이 아 니었다 . 사실 무공해 (無公害 ) 식품을 먹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 10 의 2조, 3조를 드려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10의 5조를 드린다고 해도 벌레는 없어지지 않는다 . 십일조는 벌레를 없이 하 는 살충제 효과를 내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성도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내면 꼭 부자가 될 줄 믿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데 , 십일조를 드려도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고 부자가 안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십일조는 부자가 되어 도 드려야 하고 부자가 되지 않아도 드려야 한다. 물질의 축복을 위해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근본 뜻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뜻을 알아보기로 하겠다 . 황충은 “아칼(lkea')”이라는 단어이다 . 동사일 때는 ‘먹다’, ‘삼키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05다’, ‘소화하다 ’, ‘태우다 ’, ‘소멸되다 ’는 뜻이며 명사로 쓰일 때는 ‘먹는 자’, ‘삼키는 자’라는 뜻이다 .

황충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구 절을 살펴보면 참뜻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참조. 황충에 대한 도표).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 지(lkea'아칼)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lkea'아칼)느냐”(창 3:11).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lkea'아칼)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시 79: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 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忿限)과 모든 진노 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 투의 불에 소멸(lkea'아칼)되리라”(습 3:8). 이 말씀 속에서 황충을 의미하는 “아칼(lkea')”이라는 단어는 벌 레가 아니라 재물을 ‘먹는 자들(삼키는 자들)’, ‘없이 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 다시 말해서 사람의 생명을 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무 자비한 악당들을 황충이라고 말한다 . 이같은 사람 황충이 일어나서 사회와 가정을 파괴할 때에 나와 내 가족을 해하지 못하게 하며, 내 재산까지 약탈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겠다고 약속된 것이 십일조이다 . 하나님과 주의 자녀들 사 이에 약속된 법의 참뜻을 모르고 육신적인 농작물 피해를 막아 준 다고 했다면 위증(僞證)을 한 것이 된다.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영생을 물었을 때에 답변하시는 중에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한 것 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거짓 증 거는 안 되지만 주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바로 가르치지 못했다면 거짓 증거가 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때가 차매 306한다. 우리가 듣고 배운 대로 십일조를 내면 황충(벌레)이 안 생긴다 고 성도들에게 가르쳐 온 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 지금부터 라도 성경에서 말하는 황충을 자세히 살펴서 말씀 증거에 스스로 실수가 없기를 바란다 . 남의 돈을 빼앗기 위하여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며 , 생매장하거 나 무자비하게 죽이는 인간 황충들인 막가파나 지존파같이 악랄한 자들 때문에 밤에 출입하는 것이 더욱 위험한 세상이 되었다 . 마지막 때에 나타나게 될 인간 황충은 지금 이 시대 악당들보다 더 무섭고 잔인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가 없으면 피 할 수가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 21장 18절에 아무리 악한 자들이 나타나더라도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傷)치 않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대 로 하나님의 보호가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악한 세상에 살다가 순교자로 예정되었다면 원수의 피해를 받아 육의 몸은 죽더라도 그 영혼은 아버지의 손에 맡겼기 때문에 하나 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 이 때는 자기 생명이나 가족과 재 산도 다 포기된 상태이다 .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환난 날에 이 육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주님을 맞이하려면 그 시간까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생명과 재산은 아무 피해를 받지 않고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 나님께서 인간과의 십일조 언약을 문서로 기록해 놓고 환난 날을 위한 예물(禮物)을 드리도록 했다. 앞으로 악한 자들이 벌떼같이 일어난다고 해도 온전한 십일조를 낸 자들에게는 자신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가족과 자식들까지 환난 날에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 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 그러므로 십일조는 환난 날에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07자기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아예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처 음부터 손대지 말아야 한다. 이같은 약속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십일조는 안 낼 수가 없고 낼 때도 감사하고 인색한 마음이 들지 않게 된다. 만약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릴 때 곡식이 아까워서 파종을 못한 다면 추수 때에 큰 흉년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 신원(환난)의 때는 사회가 악해지고 민심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시대이기 때문에 은혜시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是認)하여 하나님 의 백성이 되고 영혼 구원을 얻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생각하였 다.

그러나 세상 끝날이 되어 영광의 주님이 오실 때에 약속된 구 원과 축복을 바라본다면 십일조의 법을 잘 지키도록 하는 신앙을 생활화해야 한다. 성도들 중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십일조를 내며 물질 축복을 많이 받은 성도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도 많다. 그러나 십 일조만은 빈부를 논하지 말고 많든 적든 자기의 수입에서 십분의 일은 하나님께 드려야만이 하나님과의 계약이 성립된다 .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은 자는 하나님께 더 충성하고 섬기도록 주신 줄 알고 열심히 봉사와 충성을 해야 한다. 내게 주신 물질을 내 것으로 알면 착각이다 . 하나님께서 일을 잘 하라고 맡겨 놓은 것뿐이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십일조의 진가(眞價)는 마지막 때 무서운 악당들이 일어나서 인간들을 괴롭힐 때에 하나님이 이들을 다 막아 주실 때에야 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 앞으로 성도들에 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없으면 연약한 육체는 견딜 수 없기 때문에 환난을 피하는 방법과 육체 구원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 주 신 것이다 . 때가 차매 308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마지막 큰 축복을 가족과 함께 받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면 안 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계약된 예물은 다가올 환난 앞에 약속 된 법이기 때문에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수많은 인생이 쓰러지는 재앙이 올 때에 약속을 지킨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도 환난을 이길 수 있도록 책임을 지겠 다는 것이다 . 이 큰 구원을 약속받은 자는 하나님의 특별 간섭을 받음으로 놀 라운 은총을 입게 되어 전 인류가 전멸되는 불심판이 올 때에 보 호를 받게 된다. 시편 91편 7절에 보면 “천인(千人)이 네 곁에서 , 만인(萬人)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라고 하였고 , 9절에서 10절에 보면 이들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지 존자(至尊者 )로 거처를 삼았기 때문에 화가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장막 근처에 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 이 얼마나 맘이 든든한가 ! 이 축복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의 참뜻을 깨닫고 그 뜻에 따라 불평없이 십일조를 약속대로 바르게 내는 자들에게만 마지막 때에 보상해 주시겠다고 하셨으며 그들에 게는 가족과 함께 육체 구원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너희 온 영(pneu'ma 푸뉴마)과 혼 (yuch; 푸수케)과 몸(sw'ma 소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했다. 죽을 육체는 썩어지기 때문에 무익(無益)하다고 했지만 마지막 때 말씀의 법을 지키며 살아온 자들은 몸까지 영생의 축복을 받기 때문에 귀하게 보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육체를 죄의 병기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09(兵器)로 만들지 말고 흠이 없도록 잘 보관했다가 주님 나라에 들 어가야 한다. 이같은 종들은 천사도 흠모(欽慕)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천사는 몸이 없지만 우리는 몸을 가진 변화체 성도가 되기 때문이다 . 빌립보서 3장 21절에도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形體)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으니 놀라운 역사요 상상 할 수 없는 축복인 것이다 . “낮은 몸(to; sw'ma th;" tapeinw;sw" )”이란 말은 비천하고 멸시 받는 자를 뜻한다 . 주님께서는 힘 없는 “무리(o[clo" 오크로스 )”를 사랑하셨고 불쌍히 여기셨다 (마 15:30-39) . 또 “변케 한다(Metaschmatisei 메타스케마티세이 )”는 말은 고쳐서 다시 만든다는 말이다 . 썩을 육체, 가치 없는 몸을 그분이 다시 신창조 (新創造 )하여 그리스도의 형체와 같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 이다.

4 황충들의 역사와 보호 “저가 무저갱 (無底坑 )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진리의 암흑)로 인하 여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위에 나오매 저희 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저희에게 이르 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害)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印)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 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때가 차매 310같더라”(계 9:2-5) . 무저갱의 구멍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그 연기와 함께 황충이 땅 위로 나온다고 했다. 연기 속에서 나오는 황충떼들이 정면으로 기 독교에 박해(迫害)를 가하게 된다. 이 앞부분에서 열쇠를 가진 별(지도자 )이 땅에 떨어져 무저갱을 여니 황충이 연기 가운데서 무섭게 나타난다고 했다. “별이 땅에 떨어진다”고 할 때 그 별이 무슨 별인지 알아야 한다. 만약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라면 별이 무슨 열쇠를 가지고 나오 겠는가 ? 이 별은 천체의 별이 아니라 그 시대의 지도자를 가리킨 다. 여기에 나타난 황충 역시 벌레로 보면 안 된다. 기독교를 해 (害)하는 인간 황충떼가 마귀의 사상을 가지고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 이사야 33장 4절에 “황충의 모임같이 사람이 너희 노략물 (擄掠 物)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의 뛰어오름 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 오르리라”고 했다. 많은 황충들의 떼가 푸른 초장에 날아앉음같이 악당들이 기습적으로 너희 재산과 생명을 빼앗아 가겠다는 것이 다. 지금도 인간 황충들이 사람을 납치하고 죽이며 인간의 생명을 경시(輕視)하는 행동들을 하고 있다. 우리가 가히 짐작조차 못했 던 무자비한 흉악범들이 일어날 때 하나님이 막아주지 않으면 인 간으로는 피할 수가 없다. 황충을 벌레라고 잘못 생각했다가는 무 서운 인간 황충떼가 덤벼들 때 피할 길이나 막을 방법이 없다. 에스겔 9장 4절에서 6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巡 行)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可憎)한 일로 인하여 탄식 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標)하라 하면서 그 뒤를 따라 아껴보지 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장로)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11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하겠다고 하였다 . 황충이 나타나서 교회의 지도자로부터 믿는 성도들까지 잔인하 게 학살한다고 하였다 . 그러나 십일조의 언약을 지키며 이마에 인 맞은 자는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는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자의 의무이며 하 나님과 인간과의 약속이다 . 이것을 알았다면 누가 이 법을 어기며 안 지킬 자가 있겠는가 ?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히 수고하여 감사 한 맘으로 즐겁게 드리게 될 것이다 . 이러한 뜻을 모를 때는 여러 가지 조건을 달고 핑계를 대며 십 일조 내기를 꺼려하고 인색하게 된다. 심지어는 교회가 돈을 모아 들이는 수단이나 방편으로 삼는다는 비난도 거리낌 없이 하여 입 술로 판단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십일조의 약속을 지킨 자들에게는 하나님께 서도 인간 황충떼가 무섭게 일어날 때에 악한 황충들의 피해를 입 지 않도록 막아 주시겠다는 약속도 실천하게 된다.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십일조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계약이 체결된 자들은 생명뿐 아니라 그에게 속한 재물 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을 믿고 실천해야 된다. 예레미야 51장 13절과 14절에 “많은 물가에 거하여 재물이 많 은 자여 네 탐남(貪婪)의 한정(限定), 네 결국(結局)이 이르렀도 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로 맹세하시되 내가 진실로 사람을 황 충같이 네게 가득히 하리니 그들이 너를 향하여 소리를 높이리라 하시도다”라고 하였다 . 여기에서 물가라고 하는 말은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표현이며 위험하고 불안한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

황충들이 너희를 향하여 입을 벌린다고 했는데 모든 황충은 사 람 황충, 즉 악한 사람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위험한 세상 때가 차매 312에서 재물을 모아 놓았더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면 결국에 는 황충떼가 덤벼들어 다 털어갈 뿐 아니라 생명까지 희생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십일조를 약속대로 정확히 드린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지켜준다는 계약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예레미야 51장 27절에도 연합군이 사나운 황충같이 바벨론을 칠 것을 말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일어나는 황충떼도 무섭다 . 그 러나 더 무서운 것은 국가적으로 홍수같이 황충떼가 밀려올 때 얼 굴 빛이 하해지며 무릎이 서로 부딪치게 되는 두려움이라고 하였 다. 과거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은 서러움 속에서 저질러진 일제의 탄압과 만행은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일들이었다 . 그 중에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사참배 (神祠參拜 ) 사건은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잊 을 수 없는 사건이다 . 수많은 성도들과 목사님들이 일본 우상 앞에 경배하지 않는다고 구타하고 폭행하여 경찰서마다 피바다가 되어 소름이 끼칠 정도였 다고 한다. 일본 경찰의 고문을 못 견디어 죽어간 순교자들이 얼 마나 많았던가 . 앞으로 이보다 더 악한 악당들이 또 일어난다면 육체는 견딜 수가 없다. 저자는 6․25 전쟁 때 북한 공산당이 동네에 들어와서 생명과 재 산을 다 빼앗고 심지어 면(面) 공무원들과 유지들을 죽창(竹槍)으 로 죽이는 사건과 가옥에 불까지 질러 버리는 무서운 일들을 직접 목격했다 . 사탄의 충동을 받은 황충들의 잔인한 행동은 상상할 수 가 없다. 십일조의 약속을 지킨 자는 이런 악당으로부터 막아주시 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 마태복음 24장 21절에 마지막 환난은 창세 이후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환난이라고 했다.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13다니엘서 12장 1절에는 개국 이래(開國以來 )로 지금까지 없던 환난이 온다고 하니 얼마나 두려운 환난인지 모른다 . 이러한 환난 이 이 땅에 온다 해도 하나님과 약속이 되어 있는 자는 크신 보호 가 있기 때문에 염려할 것이 없다. 지금까지 죽어서 천당 가는 것 이 목적일 때는 십일조 문제를 크게 논(論)하지 않았으나 세상 끝 날에 살아서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십일조 약속만은 하나님 앞에 정확히 지켜야 한다. 1) 이마에 인 맞은 종은 피해를 입지 않는다 계시록 7장 1절에 네 천사가 네 모퉁이에서 땅 사방의 전쟁의 바람을 붙잡아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고 했다. 무서운 환난의 바람이 불지 못하게 전쟁을 잠깐 멈추게 하겠다는 것이다 . 각종 나무는 여러 민족과 모든 백성을 상징적 (象徵的 )으로 표현한 것이다 (참고. 삿 9:8-15) . 계시록 7장 3절에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印)치기까지라 고 기한을 정해 놓았다 .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친다고 했는데 이 마에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도장을 이마에 찍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역사를 뜻하는 것인데 늦은 비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나 님의 말씀 권세가 임하게 되므로 사탄의 세력을 굴복시키는 능력 을 인의 역사라고 표현한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과 의합(意合)된 종들을 불 러 비밀을 알려주시고 역사하게 하셨다 .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종 들이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각종 나무에 환난의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잠깐 동안 전쟁을 억제(抑制)하고 평화를 주 어서 그 틈에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는 역사를 하겠다는 것 때가 차매 314이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친다는 것은 요엘서 2장 29절의 남종 과 여종에게 내리는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 . 이 인은 예수 를 처음 믿을 때 보증(保證)으로 우리 마음에 인치는 것과는 다르 다(고후 1:21-22) . 이마에 인치는 역사는 그 시대의 선구자 된 종들에게 늦은 비 성령의 권세를 주어 양떼를 찾아내는 일을 하는 것이다 .

하나님께 서 예비한 종들에게 말씀 권세를 주어서 거짓 선지자의 손에 잡혀 있는 양들을 다 찾아내고 그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며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역사를 하게 된다. 앞으로 큰 복을 받을 자는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로서 마지막 추수꾼의 종이 되어 양떼를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다 . 교 회가 어두워지고 세상은 극도로 혼란해질 때 악한 인간 황충 떼가 쉴 새 없이 나타나서 더욱 극성을 부릴 것이며 , 전 삼년 반 말기 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서 인 맞지 아니한 성도들을 괴롭히게 된 다(계 9:5). 하나님은 천지 창조 때부터 인생들에게 엿세 동안에는 힘써 일 하라고 주 6일 근무제를 명령하였으나 인간들은 육의 즐거움을 위하여 주 5일 근무제를 실시하여 주말이 금요일이 되었다 . 국가 와 사회가 이런 추세로 흘러가고 모든 생산 기업체나 교육기관뿐 아니라 서비스 업체까지 이 법을 따르고 있을 때에 성도가 주일성 수를 바르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쾌락과 향 락의 물결 속에 경제의 지출은 더 많아지고 인심은 물질 앞에 노 예가 될 때 황충떼는 그 사람들을 노리고 있으며 또 그냥두지 않 을 것이다 . 주님의 나라에는 날도적이든 재물 도적이든 하나님의 것을 도적 질하는 자가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 말라기서를 볼 때에 부분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15적인 구절에만 집착(執着)하지 말고 앞뒤 구절을 다 보면서 해석 을 해야 한다. 말라기 1장은 마지막 때에 교회가 세속화되어 빛을 잃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예배 의식은 인본주의로 변하고 신앙생활은 부패할 것을 말하고 있다. 교회가 말씀의 파숫꾼이 되지 못하고 타락의 길로 가면 준비 없는 성도들은 황충떼 앞에 피할 길이 없고 그들 에게 삼킨 바 될 때에 빠져 나올 방법이 없다. 그래서 말라기 1장 10절에 의하면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가 되지 않으면 그 제사는 받지 않겠다 고 하신 것이다 . 말라기 2장에는 지도자의 부패가 나온다 .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 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여 바로 가르치지 못하는 지도자는 더 무서 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 그리고 3장은 평신도를 통해 재림의 역사를 하겠다는 말씀을 하면서 십일조 문제를 거론했다 . 말라기 3장 8절에 황충떼의 피해 를 입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날도적질하는 것이요 , 십일조와 헌물을 안 내면 알(곡식) 도적질하는 것이다 . 재물은 십 일조가 되지만 주의 날은 칠일조가 되는 것이다 . 주의 날인 칠일 조나 재물의 십일조는 아예 내 것이 아니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 (信念)을 세워야 한다. 2) 하나님의 집에 양식이 풍성해야 한다 말라기 3장 10절에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 식이 있게 하라고 했다. 성전의 모형인 성막에는 지성소와 성소가 때가 차매 316있는데 , 성소에는 분향단과 등잔과 떡 상이 있다. 하나님의 집에 는 떡이 있어야 한다. 즉 말씀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 주의 몸 된 교회인 우리는 이 시대의 말씀의 양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떡 - 주의 종은 때를 따라 나눠줄 수 있는 생명의 떡이 풍성 해야 한다(마 24:45). 언제나 성도들이 와서 진리의 떡을 먹고 만족해야 된다. 양들이 진리의 양식이 없어 굶주려 병이 들게 하면 안 된다. 등잔(촛대) - 주의 종은 빛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말씀의 빛 을 밝게 비추어 어두운 시대에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야 하기 때문에 빛을 항상 밝혀야 한다(마 5:14). 어두운 미혹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타나는 악한 자들의 손에서 양들을 보호하고 잘 지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 분향단 - 주의 종은 기도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기도 외에 다른 방패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막 9:29)? 기도의 힘 은 하나님의 뜻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 니느웨가 40일이 면 멸망받기로 결정되었지만 왕과 국민이 식음을 전폐 (全廢)하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다 (욘 3:10)

. 심지어 기도 중에는 짐승까지도 먹이를 중단했 었다. 그리고 이사야 38장 1절에서 8절까지 보면 히스기 야 왕은 죽을 병이 들었으나 하나님께 충성한 업적을 내 어놓고 벽을 향하여 통곡할 때 눈물의 기도를 보시고 그 뜻을 돌이키셨다 . 이같은 역사는 기도 외에 더 큰 힘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말씀의 양식과 진리의 빛과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향은 교회가 꼭 갖추어야 할 3대 조건이다 . 양들은 진리의 빛 속에서 생명의 떡을 얻고 기도의 능력을 얻게 되면 어떠한 미혹에도 이기고 승리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17의 삶을 살 수 있다. 3) 합당하게 봉사해야 한다 이사야 55장 2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糧食) 아닌 것을 위 하여 은(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聽從)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 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 은(@s,k,케세프)은 돈을 말한다 . 돈을 달아서 낸다는 것은 십일조 인데 십일조를 드리되 정성없이 아무 곳이나 아무렇게나 드리면 안 된다. 영혼의 양식이 되는 곳에 정성을 다하여 드려야 하는데 생명의 양식이 되지 못하는 데에 내는 십일조는 합당치 않으며 하 나님께서 기뻐하시지도 않고 받으시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 . 또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하느냐”라고 했는데 , 배부르 게 하는 것은 영의 만족한 양식으로 배부른 것을 말한다 . 다시 말 해서 봉사를 해도 마지막에는 살리는 말씀이 있는 곳, 즉 시대의 양식이 되는 곳에서 봉사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겠 다는 것이다 . 종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영이 살아갈 수 있는 양 식이 될 때에 온전한 십일조를 정성드려 내고 감사헌금이나 봉사 와 충성도 아낌없이 하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섬기는 교회에 말씀 의 양식이 풍성하도록 온 성도는 기도하며 노력하여야 영혼의 양 식을 만족하게 얻어 먹을 수 있다. 황충에 대하여 말라기 3장 11절에만 “먹는 자”“아칼(lkea)”이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다른 데서 황충의 단어를 보면 수많은 메 뚜기 종류로 기록해 놓았다 . 셀 수 없는 메뚜기 떼가 푸른 곡식밭에 한 번 앉으면 곡식밭은 때가 차매 318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다 . 이처럼 무섭게 밭에 앉아 곡식을 다 갉아 먹어버리면 농작물은 완전히 망쳐버리고 만다. 수많은 곤충 떼가 곡식밭에 앉듯이 세상 끝날에 악인들이 준비없는 성도들을 메뚜기 떼같이 덮쳐 박해(迫害)와 살생을 한다는 것이다 . 황충이 나오는 구절들을 살펴보면 큰 재앙이 올 때나 메뚜기 떼같이 큰 군대들이 잔인(殘忍)한 행동을 하는 것을 황충이 피해를 준다는 비유로 표현한 것이다 . 악인의 무리가 물밀듯이 들이닥쳐서 불법을 저지르며 악한 행동 을 하여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에 십일조 문제를 해 결하고 깨어 준비하는 성도는 황충의 피해를 당치 않게 된다. 하 나님과 약속한 십일조의 계약을 지키는 자는 반드시 약속대로 책 임을 지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큰 축복 과 큰 환난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주님 부탁하신 말씀을 등한(等閒) 히 여기지 말고 차근 차근 준비해야 한다. 4) 황충들의 모양과 위력 계시록 9장 7절에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예비한 말들 같다고 했다. 옛날 전쟁 때는 말들이 무서운 속력으로 충돌하며 달려가면 서 싸웠다 . 훈련받은 황충들이 기세가 당당하게 덤벼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 전쟁터에 나가는 말들처럼 황충들이 달려든다면 피할 곳이 없 다. 아무 준비 없이 육신의 쾌락을 쫓아다니다가 (주일날 대충 새벽예 배만 갔다가 등산과 낚시와 골프와 야유회나 가고, 주일날에 예식장에 다니 고 하다가 ) 덫과 같이 뜻밖에 닥치는 환난에 빠지게 되면 땅을 치 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 .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19황충이란 단어가 들어 있는 중요한 구절 왕상8:37 (대하6:28)만일이땅에기근이나온역이있거나곡식이시들거나깜부기가나거나메뚜기(hB,r.a; 아르 베)나황충(lysx' 하실)이나거나적국이와서성읍을에워싸거나무슨재앙이나… 시78:46저희의토산물을황충(lysx' 하실)에게주시며저희의수고한것을메뚜기(hB,r.a; 아르베)에게… 시105:34여호와께서말씀하신즉황충(hB,r.a; 아르베;)과무수한메뚜기(ql,y, 예레크)가이르러… 사33:4황충;(lys.x' 하실)의모임같이사람이너희노략물을모을것이며메뚜기(bGE게브)의뛰어오름 같이그들이그위로뛰어오르리라 렘46:23나여호와가말하노라그들이황충(hB,r.a; 아르베)보다많고계수할수없으므로조사할수 없는그의수풀을찍을것이라 렘51:14만군의여호와께서자기로맹세하시되내가진실로사람을황충(ql,y< 예레크)같이네게가 득히하리니그들이너를향하여소리를높이리라하시도다 렘51:27땅에기를세우며열방중에나팔을불어서열국을예비시켜그를치며아라랏과민니 와아스그나스나라를불러모아그를치며대장을세우고그를치되사나운황충(ql,y< 예레 크)같이그말들을몰아오게하라 욜1:4팟종(~z"G" 가 잠)이가남긴것을메뚜기(hB,r.a; 아 르 베)가먹고메뚜기가남긴것을늣(ql,y< 예 레 크)이 먹고늣이남긴것을황충(lysx' 하실)이먹었도다 욜2:25내가전에너희에게보낸큰군대곧메뚜기(hB,r.a; 아르베)와늣(ql,y< 예 레 크)과황충(lysx' 하실)과 팟종(~z"G: 가잠)이의먹은햇수대로너희에게갚아주리니 암7:1-2주여호와께서내게보이신것이이러하니라왕이풀을벤후풀이다시움돋기시작할 때에주께서황충(bAG 고브)을지으시매황충(hL'K' 카라)이땅의풀을다먹은지라… 나3:15-17거기서불이너를삼키며칼이너를베기를늣(ql,y< 예레크)의먹는것같이하리라네가늣 (ql,y< 예레크)같이스스로많게할지어다네가메뚜기(hB,r.a; 아르베)같이스스로많게할지어다 네가네상고를하늘의별보다많게하였으나황충(ql,y< 예레크)이날개를펴서날아감과 같고너의방백은메뚜기(hB,r.a; 아르베)같고너의대장은큰메뚜기(bAG 고브)떼가추운날… 말3:11만군의여호와가이르노라내가너희를위하여황충(l.kea' 아칼)을금하여너희토지소산을 멸하지않게하며너희밭에포도나무의과실로기한전에떨어지지않게하리니… *아칼(l.kea')은먹는자,삼키는자 마3:4(막1:6)요한은약대털옷을입고허리에가죽띠를띠고음식은메뚜기(ajkriv" 아크리스)와석청… 계9:3또황충(ajkriv" 아크리스)이연기가운데로부터땅위에나오매저희가땅에있는전갈의권 세와같은권세를받았더라 계9:7황충(ajkriv" 아크리스)들의모양은전쟁을위하여예비한말들같고그머리에금같은면류 관비슷한것을썼으며그얼굴은사람의얼굴같고… 697(hB,r.a;)=아르베 (메뚜기 ) 출10:4,12-14,19 레11:22 신28:38 삿6:5,7:12 왕상8:37 대하6:28 욥39:20 시9:23,78:46,105:34 잠30:27 렘46:23 욜1:4,2:25 나3:15,17 2625( lysx')=하실(메뚜기 ) 왕상8:37 대하6:28 시78:46 사33:4 욜1:4,2:25 3218( ql,y<)=예레크 (메뚜기 ,늣) 시105:34 렘51:14,27 욜1:4 욜2:25 나3:15,16 1501( ~ z 'G)=가잠(메뚜기 ) 욜1:4,2:25 암4:9 1462( b A G)=고브(메뚜기 ) 암7:1 나3:17 3615( hL'K')=카라(소멸,멸절,쇠잔,완성) 398(l.kea')=아칼(먹다,삼키다 ,태우다 ,소화하다 ,사르다 ) 창3:11 삼하9:10 렘2:30 시79:7 겔9:6등 1357( bG)=게브(메뚜기 )200(ajkriv")=아크리스 (계 9:3,7) 때가 차매 320황충의 머리에는 금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다고 했다. 금면류관 은 이긴 자를 뜻하는데 승리할 것 같은 기세로 나타나서 덤벼들 뿐 승리는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금면류관이 아니고 비슷한 것을 썼기 때문이다 .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다고 했는데 황충 이 사람의 얼굴로 나온다는 것은 인간이 비상(非常)한 지혜가 있 음을 말한다 .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다고 했는데 여자의 머리털 은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고 다른 형태로 바꿀 수가 있다. 이 황 충들은 법을 자기 마음대로 수시로 바꿀 수 있고 변경할 수 있음 을 말하는 것이다 . 막강한 힘과 지혜를 다 동원하여 별별 수단 방 법을 가리지 않고 바꾸며 임기응변 (臨機應變 )에 능하다는 것인데 이같은 행동은 잔인하게 사람을 괴롭힌다는 말이다 . 황충들의 이 (爾)는 사자의 이와 같다고 했다. 사자 이빨은 잔인함을 표시한다 . 이렇게 두렵고 살벌한 악당들이 인 맞지 아니한 성도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준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두려운 환난인지 모른다 . “또 철흉갑 (鐵胸甲 )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 (兵車)와 많은 말들이 전장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 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 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고 하였다 (계 9:9-10) . 꼬리에서 피해를 준다는 것은 말단(꼬리) 황충들이 더 무섭고 잔인하게 해한다는 것이다 . 무서운 독이 있는 전갈이 사람을 한 번 쏘면 그 고통은 견딜 수가 없다. 황충들이 일어나 사람을 괴롭 힐 때 전갈에 쏘이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 황충떼가 벌레라면 벌레가 어떻게 인 맞은 자와 인 맞지 아니한 자를 알겠는가 ? 벌레가 아닌 사람 황충 들이 나타나서 다섯 달 동안 괴롭게 하는데 아무리 죽고 싶어도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21죽지 못한다고 했다. 악당들에게 받는 무서운 고문(拷問)과 괴로운 고통은 인간으로 서는 이겨낼 수 없는 환난이다 . 이것을 벌레에게 물리는 정도로 생각하면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이다 . 황충들이 주는 고통이 너무 괴로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5개월 동안 죽음이 피한다고 했 으니 죽을 수도 없이 당하는 고통이라고 했다. 황충떼가 아무리 강해도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린 종들에 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을 지겠다는 것과 마지막 종들에게는 말씀 권세를 주기 때문에 그 앞에는 당할 자가 없게 된다는 것이 다. 황충들의 난리 속에서라도 말씀으로 역사하는 종들을 따라가 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신다 . 그러므로 참된 성도로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 면서 충성한 자들의 결과는 황충들이 나타났을 때 효과를 알 수 있다. 십일조 문제를 해결해 놓으면 잔인한 악당들의 피해를 받지 않 고 어린 자식까지 보장해 주겠다고 하신 약속의 열매가 나타날 것 이다. 만약 자신은 주님을 맞이하였지만 준비 없는 자식이나 식구 가 주님을 못 맞이한다면 얼마나 큰 불행이며 가슴 아픈 일이겠는 가? 그래서 노아의 가정같이 온 가족이 함께 준비하여 구원받게 되 니 온 땅이 너희를 복되도다 하리라고 했다(말 3:12). 이러한 약속 을 믿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로 심은 종들은 황충들의 난리에서 생명을 잃지 않고 영생을 거두는 자가 될 것이다 . 그러므로 하나 님의 것인 십일조를 약속대로 바로 드리는 것은 무서운 환난과 바 꾸는 셈이 되는 것이다 .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생명을 심고 생명을 건졌고 (수 때가 차매 3222:1-22, 6:22-25, 약 2:25), 이방 땅에 살던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 의 사람에게 빵을 심고 빵을 거두어 생명을 얻었다 (왕상 17:8-16) . 마지막 사명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법과 주의 명령을 생명같이 지키고 충성하며 살아야 한다. 이런 자를 하나님이 특별한 소유로 삼고 아낀다고 하였고 하나님의 기념책 (記念冊 )에 기록될 자라고 했다(말 3:16-17) . 환난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십일조를 드리면 벌레를 막아준다고 물질의 축복만을 강조한다면 환난 날을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 세 상 끝날에 이런 축복의 비밀이 감춰져 있다는 것을 이제라도 깨달 았다면 말씀대로 행하여야 할 것이다 .

5) 큰 환난 전에 불려갈 자들도 있다고 했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慈悲)한 자들 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禍厄) 전에 취하여 감 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正路)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 라”(사 57:1-2) . 환난 전에 주님께서 그 영혼을 부르시어 천당에 가서 편안히 쉬 는 자들도 있다고 했다. 이 사람들은 은혜시대에 십자가 신앙의 정로로 간 자들인데 주 님만 의지하고 성경은 잘 몰라도 그저 한결같이 신앙생활을 바로 한 사람들이다 . 열심으로 전도생활과 기도생활 및 교회에서 희생 적으로 봉사하면서 자신을 아끼지 아니하고 주의 일을 많이 한 자 들이다 . 그러나 이들은 은혜시대로는 부족한 것이 없으나 신원의 날의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23준비는 하지 못한 자들이다 . 이러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무서운 황충들의 환난을 당하기 전에, 즉 화액 전(禍厄前 )에 그 생명을 불러가게 되므로 낙원에서 부활을 기다리게 된다. 오히려 이 땅에 남아서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종을 폄론(貶論)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다가 심판 날에 황충들에게 넘어가서 못 견딜 고난을 받는 자보다 복된 죽음이 될 것이다 . 화액 전에 불려간 자들은 천년 안식시대는 들어가지 못해도 무 궁 안식시대에는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 시대는 잘 죽는 것이 큰 축복이다 . 열심히 주의 일을 하고 충성하 며 기둥 같은 일꾼들이 쓰러져 주님께 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이들은 환난 전에 주께로 가서 쉬는 자들이기 때문에 복되다고 말 하고 있다. 그러나 은혜시대 때 가장 복된 죽음은 진리 때문에 순 교한 자들이다 . 진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과 가정도 다 포기하고 순교의 길을 택한 자들에게는 마지막 때 큰 보상이 따르게 된다. 과거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은 세상 끝날까지 살 수 없었기 때문에 1차 부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한다 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계 20:4-6) .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마지막 시대에 가장 큰 축복을 받는 것은 늦은 비 성령의 인침을 받는 자이며 환난 날에 온 가족이 육체 구 원을 얻은 자들이다 . 이들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이기 때문에 부활 성도와 다르다 . 순교자들은 원수의 피해를 입었으나 천년 안식시대가 올 때 1차 부활하여 충성한 상급으로 왕노릇하 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마지막 때까지 살아남은 자 는 원수들의 피해를 입지 않고 가족과 함께 천년 안식시대에 들어 가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게 될 자들이다 . 그러므로 살아 서 그 땅에 들어갈 자는 십일조와 황충떼는 불가분 (不可分 )의 관 때가 차매 324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십일조에 대한 바른 목적을 깨닫도록 해 야 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말씀대로 순종하여 온전히 드리는 십 일조와 나와의 관계로 나타나는 축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 십자가를 붙든 성도들이 날의 칠일조와 재물의 십일조 약속을 하나님 앞에 지키게 된다면 큰 환난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도 크 게 신경을 쓸 일은 아니다 . 이 땅위에 전무후무한 환난이 온다고 해도 말씀대로 충성한 종은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자녀들의 생명 까지 지켜 주신다니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 이것이 십일조를 내는 목적이며 마지막에 예비된 축복이다 . 이 날까지 죽음과 고통 속에 서 광야 험한 길을 걸어가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을 가진 자 가 되어 반드시 그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의 주인공 (主人公 )이 되 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 5 그 나라에 들어갈 자는 반드시 십일조를 내야 한다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 나 보라”(말 3:10). 십일조를 온전(穩全)히 내는 자에게는 하늘 문을 열어 놓고 축 복을 부어주겠다는 것이다. 복은 “베라카 (hKD'B .)”인데 ‘선물’ 혹은 ‘예물’이라는 뜻으로 “바라크 (%r;B 축복)”에서 온 말이다 .

마지막 때에 십일조 약속을 지킨 종들에게 하늘 문을 여시고 축 복의 선물을 주시는데 재산과 자식까지 복을 넘치게 부어 주시고 지켜 주겠으니 그 때에 한 번 보라는 것이다 . 앞으로 다가올 7년 대환난 중에 전 3년 반의 환난과 후 3년 반 동안은 사람이 감당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25할 수 없는 큰 재앙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 때에는 하늘 보좌로부 터 택한 백성의 생명뿐 아니라 그 종의 물질까지 악당들이 손을 대지 못하도록 지켜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 환난 날에 인간 황충을 철저히 막아 주셔야 살아서 주님을 맞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십일조의 약속을 문서로 기록해 놓고 지키도록 하셨다 . 이 큰 약속을 모르고 지금까지 농작물에 벌레를 막아주는 십일조로 잘못 알고 전하여 왔으니 얼마나 주님 앞에 부끄럽고 송 구스러운 일인가 . 노아 홍수 때에는 심판하기 위하여 하늘 문이 열렸다 .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방주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을 모두 물로 심판하 기 위하여 하늘 문이 열려 40주야로 큰 비가 땅에 쏟아져서 전 인류가 다 물심판으로 죽어 갔다(창 7:11-12) . 이 때 노아의 입을 통하여 큰 심판을 경고하였으나 모든 백성들은 듣지 않고 무시하 다가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죽었으나 노아 가정만은 심판의 저주 속에서 축복을 받았다 . 하늘 문을 여시고 물을 쏟아 심판하셨던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 에도 동일한 말씀으로 이 땅을 불로 심판하실 때 약속대로 십일조 를 낸 자들을 위하여 축복의 하늘 문을 또 여시겠다는 것이다 . 원 수를 멸하는 심판날에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고 복(베라카 hKD'B .)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으시겠다는 것이다 . 너무 나 확실하고 정확한 약속의 언약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서는 너희가 십일조를 드리고 나를 시험해 보라고 하셨다 . 시험이 라 는 단 어 는 “우 베 하 누 이 (ynIWnx'b.W )”로 ‘시 험 하 다 . 조 사 하 다 . 검 증 하 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약속한 말씀을 하나님이 지 키지 않나 조사해 보라는 것이다 . 그리고 “우베하누이”란 단어 뒤 에 ‘제발. 원컨대 . 바라건데 ’라는 단어인 “나”(ab')가 들어 있다. 다 때가 차매 326시 풀어보면 ‘제발 시험해 보라. 조사해 보라’고까지 말씀하신 것 이다. 그리고 또 십일조를 바로 잘 내면 이 땅위에서 사업이 잘 되기 도 하고 복을 받는 자들도 많다. 이같은 축복은 십일조를 바로 낼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역사해 주시는 증거를 보여 주어 더 열심 히 주의 일을 하라는 것이다 . 마치 주일학교 학생이 열심히 교회 에 다니면서 전도하고 연보하며 감사할 때에 성탄절 날 교회에서 상을 받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은 더욱 열심히 하 라고 격려하는 상일 뿐이지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주님 나라 에 가서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을 주실 때는 주의 일을 더 열심히 잘 하라는 명령인 줄 알고 겸손히 섬기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 그 다음에 환난 날에 황충떼인 악당을 막아주시고 약속한 나라에 들 어가는 보상을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허락하시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말씀을 준비한 자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과 특별 보호가 있어야 나와 내 가족이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 지금까지 십일조에 대한 바른 해석을 모르고 처음부터 잘못 배 웠기 때문에 증거할 때도 잘못 전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 십일 조 문제만 나오면 말라기 3장 8절에서 10절만 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고 하였고 배운 공식대로 십일조를 잘 내면 황충 을 막아주고 부자가 된다고 항상 말해 왔다. 십일조의 깊은 뜻을 모르고 이 땅에서 얻는 물질 축복의 개념에만 초점을 맞춰온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 만약 대통령의 담화문 (談話文 )을 국무총리나 도지사가 자기 마 음대로 뜯어 고쳐 전달했다면 대통령이 당장 소환하여 호통을 칠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27것이며 , 목이 열 개라도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이다

. 그런데 대통령 보다 더 위대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을 종들이 자기 생각 대로 발표해 버렸다면 하나님은 그대로 넘기지는 않으신다 . 종이 전해야 할 기본 목적을 바로 알리지 못하고 다 뜯어 고쳐서 전달 했으니 겁 없이 간 큰 짓을 한 것이 분명하다 . 그러나 은혜시대는 이러한 실수도 다 용서하신다 . 십자가의 피 에 대한 믿음만 확실하면 모든 실수를 덮어 문제를 삼지 않는 것 이 은혜시대였다 .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십일조 를 아예 내지 않아도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았다 . 그러나 앞으로 오 는 신원의 때는 은혜시대가 아니다 . 지금까지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조용히 살 피고 계셨으나 신원의 날에는 말씀시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말 씀의 잣대로 측량하신다 . 믿음을 강조하는 시대가 은혜시대라면 그 믿음 위에 말씀의 법대로 진행하는 시대는 환난시대이기 때문 에 말씀에 대한 실수는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 이러한 말씀을 바로 깨달아야 하나님께 충성하게 되고 예물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게 되며 시험이 오지 않는다 . 십일조의 참뜻을 모르면 온전한 십일조를 내지 못하고 적당히 봉투에 넣어 내기도 하며, 십일조를 가지고 감사도 하고 각종 헌 금으로 쪼개서 드리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십일조의 의미를 모르 고 하는 행동이다 . 감사하고 싶으면 십일조를 뗀 후에 나머지 몫 을 가지고 드려야 할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이 땅위에 사는 자기 백성에게 십일조의 법을 세 우시고 너희가 시험해 보라고 하신 것을 그냥 넘기면 안 된다. 이 말씀은 반드시 약속한 대로 실천하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에 주님 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껏 드려야 한다. 때가 차매 328만약 십일조가 밀린 사람은 오래 두지 말고 빨리 청산을 해야 마 지막 축복에서 밀려나지 않게 된다. 앞으로 십일조에 대하여 올바 른 뜻을 알게 되면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게 되고 피동적인 신앙 상태에서 능동적으로 실천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크게 기뻐하신다 . 끝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성도가 가장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첫째, 주의 날은 손대지 말라. 엿새는 우리에게 다 허락해 주셨다 . 그러나 주의 날은 우리의 날이 아니다 . 6일이 나를 위해서라면 7일째 한 날은 주님을 위하여 드리는 날이 되어야 하며 이 날은 내 맘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 둘째, 십일조는 손대지 말라. 모든 수입의 10분의 9는 우리가 사용하게 허락하셨다 . 그러나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으로 결정되어 있으니 이 것만큼은 맘대로 하면 안 된다. 셋째, 하나님의 집에 있는 성물에는 손대지 말라. 이 땅의 모든 것은 내 생각대로 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것으로 바쳐진 것은 내 맘대로 하면 안 된다. 내가 바쳤 더라도 내 손에서 떠나 주님께 드린 바가 되면 내 것이 아니다 . 내가 했다고 생각하면 마귀가 시험을 가져오게 되므로 조심해야 한다. 넷째,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쓰는 주의 종에게 손을 대지 말 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불러 쓰시는 종을 인간이 간섭하거 나 괴롭히면 큰 낭패를 당한다 . 하나님이 쓰시는 다윗에 십일조의 비밀과 감춰진 약속의 축복 329게 손을 댄 사울 왕의 가정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 위의 네 가지는 반드시 알아야 하고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것 에 손댈 때는 하나님이 무섭게 간섭하시고 진노하신다는 것을 잊 어서는 안 된다.

1. 십일조의 기원

2. 십일조는 왜 내야 하는가

3. 황충이란 무엇인가

4. 황충들의 역사와 보호

5. 그 나라에 들어갈 자는 반드시 십일조를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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